지혜의 말씀을 보고 계십니다
『영성과 지성의 교류』 칭하이 무상사와의 토론
포모사(대만) 타이베이 2000년 5월 6일

칭하이 무상사님 대만 국립 대학의 루안 지성 교수님 여러 학술 단체와 지역 단체에서 오신 친구 여러분 안녕하세요?(네) 오늘처럼 중앙 연구원이 하나의 주제를 놓고 종교적이며 학술적인 관점으로 탐구하는 기회를 갖는 것은 드뭅니다 중앙 연구원 근대사 연구소에는 해외 중국인 연구 단체가 있습니다 본인은 그 단체의 단장입니다

최근에 저희 단체에서 일련의 강연을 후원해 왔습니다 금년부터는 대만 종교 학회와 린 메이롱 회장의 권고와 지원으로 우리 연구가 순조롭게 추진됐으며 동남아시아 중국인에 관한 연구에 종교도 포함시켰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같은 중앙 연구원 세미나에 중요한 종교 지도자 한 분을 초빙했습니다 이 번은 8회에 걸친 강연 중 4번째이며 우린 회교,기독교, 일관도에 관한 강연을 가진 바 있습니다

오늘 주제는 매우 특별한 것으로 칭하이 무상사께서 이끌고 가르치는 관음 법문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차원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하죠 이 법문은 전 세계 중국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중앙 연구원의 다른 프로젝트와 동남 아시아 연구 프로젝트를 공동 진행하고 있습니다 샤오 싱황 교수님께서는 프로젝트 전체를 책임지고 계시며 오늘 사회도 보시고 이번 활동도 열심히 지원하셨습니다

이번 행사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중안 연구원의 각 부서 간에 협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는 겁니다 또한 다른 두 단체가 저희와 함께 해주시고 특히 중앙방송국 대표 웬 프로듀서께서 함께 해 주셔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는 국제 라디오 프로그램 『해외 중국 교포 사회 방송』의 프로듀서이십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오늘 강연을 전세계에 방영할 예정이며 오늘 강연 내용이 전부 녹음될 겁니다 이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의 음성이 수록되길 바랍니다

칭하이 무상사님의 음성 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음성이 녹음될 겁니다 그리고 감사드려야 할 또 다른 단체는 중국 학술 교류 협회입니다 19년 전 협회가 창설된 이래 포모사(대만) 전역의 대학 교수들의 지원을 받으며 일련의 제휴 활동을 시작해 왔습니다 거의200명에 달하는 박사들이 이 협회에서 다양한 제휴 활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사실 종교와 동남아 중국인에 관한 활동들은 고도의 전문적인 학문 연구 분야입니다 그래서 이 행사에 참석해 주신 중국 학문 협회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방청객 중에도 중요한 지도자들이 몇 분 계십니다 물론 일련의 강연에 특히 칭하이 무상사를 모시는 이 4번째 강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주신 중앙 연구원에 가장 큰 감사를 드립니다 이 행사는 학술 활동이 기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여러분에게 부탁을 해야겠습니다 이 세미나는 이른바 『학술 강연』을 하는 학술 토론입니다 칭하이 무상사께서 하시는 관음 법문과 동남아 중국인에 대한 말씀을 경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칭하이 무상사는 여러 곳을 여행하셔서 특별히 이 주제에 대해 말씀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먼저 동남아 중국인과 다른 홍법 활동들과 단체 그리고 그 외 순서를 발표한 다음 처음부터 현재까지의 발전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유보할 부분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필히 교리를 언급하겠지만 좀 더 동남아 중국인에 촛점을 맞추기 바랍니다

말하자면 동남 아시아 밖의 교리나 홍법 그 발전 과정 관련된 애로 사항들과 앞으로의 전망들은 보물 처럼 유보해 두었다가 다음 기회에 토론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방금 말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동남아 연구 기획 샤오 싱황 교수님이 후원하는 것이며 동남아이기 때문에 정해진 의제에 따라 동남 아시아를 검토한다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세상 어디에도 심지어 타요완 현 경기장에도 이런 귀중한 기회는 없다고 봅니다 동남아시아 중국인에 관한 학술 연구에만 집중해서 다뤄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증언과 함께 이 주제에 관한 정보가 더 많이 모였으면합니다 시간이 제한돼있습니다 이제 삼가 칭하이 무상사님을 모셔서 『관음 법문과 동남아 중국인』에 관한 말씀을 듣겠습니다 시작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를 신뢰해 주시고 이런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늘 포모사 (대만)을 고향처럼 생각합니다 오랫 동안 해외에서 바빠서 돌아오질 못했어요 어제 강연을 했는데 그걸 참고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여기 와서 이런 특별한 발표를 하기로 약속했으니 의장님이 정하신 지침에 따른 주제에 한해서 말하겠습니다 주제에서 벗어나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발전한다는 것은 일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러 나라와 여러 곳에 연락처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센터들이 있습니다 동남 아시아에 형제 자매들이 더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동료 수행자』를 말하는 겁니다 『동료 수행자』란 같은 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처음에 나는 포모사(대만)에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모두들 나를 포모사(대만) 사람처럼 대합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어제 나는 집에 온 것처럼 느꼈어요 내가 해외에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포모사(대만)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다른 곳에 구호 활동을 갈 때도 우리를 포모사(대만) 단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나를 포모사(대만) 사람으로 봅니다 몸이 이 곳에 있지 않을 때에도 마음과 영혼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꿀 수 없어요 아마 이전 생애에 여기서 태어났나 봐요 어떤 사람들은 명상하는 중에 내가 전생에 여기서 고구마 잎을 먹는 걸 봤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연이 깊지요

처음 포모사에 도착했을 때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하지만 즉시 포모사(대만)인들이 나를 껴안고 돌봐주었지요 난 깊이 감동했어요 내가 여기서 계를 받았을 때 난 전통 관습을 따르며 규칙과 계율을 지켰습니다 마치 운전을 배울 때 교사의 지시를 따르듯이 말이에요 우리를 감독하는 사람과 함께,우리는 그 지침에 따라서 엄격히 운전합니다

일단 운전법을 배우면,더이상 선생님이 필요없지요 운전 규칙에 익숙해져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모두들 나를 잘 돌봐줬어요 모든 절이 환영했고 대우를 잘해줬습니다 그런 뒤 한 동안 포모사에 살았어요 한번은 한 절에 은거 중이었어요 자정에 12명 정도 사람들이 와서 문을 두드렸어요 그 시간에 사람들이 와서 난 당황했어요 그들이 들어와서 관음보살이 그들에게 가서 배우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 땐 사람들을 거의 몰랐고,안거 중이라 사람들이 날 안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관음보살이 그들에게 알려줬다고 말했어요 난 사람들을 가르칠 준비가 안 됐지만 그들의 신실함에 그렇게 시작하게 됐죠 하지만 내가 포모사 시민이 아니었기에 1년 이상 미국에 머물러 갔습니다 거기서도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그들의 신이 말하길 그 절에서 날 찾으라고 했다고 했죠 이렇게 미국인과도 인연을 맺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인과 인연을 맺었어요 그런 뒤 비자가 만료돼서 떠나야했죠

난 미국으로 갔어요 그렇게 미국인과 인연을 맺은 뒤에 포모사(대만) 사람들이 내가 좋다며 돌아오라고 요청했습니다 난 돌아왔고 얼마 간 여기서 머물렀어요 그렇게 우리는 포모사(대만)에서 성장하게 됐습니다 자연스런 인연이죠! 나중에 난 포모사와 미국을 왔다갔다 했어요 그 후 중국인들과의 관계 때문에 중국인들이 있는 동남아 같은 다른 나라에도 오갔습니다 입소문이 퍼졌으니까요 그 당시엔 인쇄물이나 시청각 자료들을 발행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입소문을 퍼뜨렸고,그런 다음 거기로 날 초대했어요

난 싱가폴과 태국 인도네시아 등등에 갔습니다 그러자 동남아에서 발전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미국에서 발전했지요 처음에 우리는 주로 포모사와 중국인이 있는 동남아에서 성장했습니다 싱가폴과 말레이시아 태국을 이야기했지만 중국인들은 어디나 있습니다 거기서는 중국어나 복건어 혹은 하카 같은 방언을 할 수도 있죠 그들 모두 중국인이죠 태국의 어떤 방언은 중국의 방언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발견했어요

몇몇 태국인들이 중국의 어떤 지역에 방문했어요 운남성에서,그들은 그곳 말이 태국과 같다는 걸 발견했어요 소통이 가능했지요 이는 한때 우리 중국인들이 태국에 살았다는 걸 증명해요 싱가폴인들도 중국어를 합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난 중국말을 전혀 못했어요『어머니는 어떠신가요?』했죠 (『안녕하세요』를 잘못 표현함) 난 정말 언어를 몰랐어요 선배 수행자들이 절에서 『아미타불』 염불을 할 때 난 그들이 하루종일 『두부』를 외우는줄 알고 놀랐습니다 나중에 이해했고 금새 배웠어요

난 중국인이 좋아요 그들은 정말 나를 자매처럼 잘 대해줘요 아마 전생의 인연 때문이겠지요 우리는 언어장벽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었어요 포모사(대만)에 머물렀기 때문에 중국어를 좀 배워야했어요 난 다른 이들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중국어를 좀 이해할 수 있지요 아직도 몇 개는 기억해요 해외를 다닌 뒤에도 다 잊지는 않았어요 우리는 이렇게 계속했습니다 나중에,포모사에 센터를 여러 개 건설했어요 모두가 연락인을 자원해서 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기반과 연락처를 세우고 다른 나라들 특히 동남아로 넓혀갔습니다 의장님이 동남아시아에 한하여 말하도록 요청하셨으니 그렇게 하고 다른 곳은 무시하겠습니다 동남아와 다른 아시아 국가 여러 곳에 수많은 연락처를 두고 있어요 현재 그런 상황이지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 관해 알게 되고 센터의 수가 늘자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만나고자 했어요

그래서 비디오와 테이프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모든 곳에 내가 육체적으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비디오와 오디오 테이프를 만들기 시작했고 우리 소식이 더 퍼졌죠 나중에 우리에게 오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견본 책자를 인쇄했습니다 뒤에는 뉴스 잡지도 출판했어요 이렇게 우리는 자연히 발전했습니다

우리 센터는 전혀 호화롭거나 웅장하지 않습니다 그들 대부분 평범한 집에 위치해 있지요 어떤 곳은 얇은 금속판으로 지어진 가건물입니다 전혀 거창하지 않지요 우리는 큰 절과 같은 것을 지은 적이 없어요 그런 것을 지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료 수행자들이 센터가 초라하다고 생각해서 자원해서 센터를 가꾸려고 합니다 우린 텐트에서 살았어요 아직도 양명산에 몇몇 텐트가 있습니다 가끔 포모사에 와 있을 때 시간이 나면 잠시 그 곳에 가서 머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지으려고 하지 않아요 때때로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무상사님 말레이지아에 관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칭하이 무상사 국제협회에서 준비한 자료를 우리가 받았는데요 20 페이지를 보면 거기 말레이시아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슬람 교도입니다 (네,그래요) 어떻게 그런 활동들을 (소개요) 소개할 수 있었으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왔지요

중국 사람들은 대부분 천성적으로 전통적입니다 게다가 우리 관음법문은 종교 간에 분별을 만들지 않습니다 베일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와 함께 절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설명한대로 관음법문은 우리를 이끌어 불성과 내면의 천국으로 데려 갑니다 여러분이 외면으로 무엇을 믿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우리 사람들이 함께 명상할 때 때로 그들은 다양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무슬림은 이슬람 옷을 입고 불교 출가승들은 불교 승복을 입기도 합니다 다양한 나라의 출가승들은 심지어 다른 승복을 입지요 일부 승려들은 소승불교 출가승이고 일부 승려들은 대승불교입니다 그들은 옷이 다르지요 중국 사람들도 있고 한국 사람들도 있어요 정말로 다양합니다 다채롭기도 하고요 아주 다양한 종류의 패션이 있어요 모두 거기 익숙합니다 각자 그냥 마음으로 명상할 뿐입니다

어떤 종교적 논제든 토론할 필요도 없고요 그들은 자성을 깨닫고 더 나은 무슬림이 됩니다 더 나은 불교도와 카톨릭 신자가 되지요 다른 종교들도요 모두들 사랑과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소위 외적 전통은 우리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물론,대승불교나 다른 무슬림 국가들은 의장님이 인식한 대로 포모사(대만)처럼 일이 쉽진 않습니다 한계가 조금 있지요 하지만 그들의 정부는 우리와 관계없습니다 꽤 자유로운 편이지요 무슬림인들이 솔선해서 우리에게 동참하는 건 괜찮아요 우린 절대 그들의 문을 두드리거나 무슨 일을 하지 않아요 그들 스스로 옵니다

우린 인도네시아에 중국에 대한 반감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과거에요) 그래요! 1992년에 거기서 강연을 하셨고 그들은 스승님을 따라 나라에 입국했습니다 이것은 안내서 21쪽에 나와 있습니다 1992년 3월에요 3월에 인도네시아 정부의 초청으로 칭하이 무상사님이 입국하여 거기서 강연을 하셨습니다 질의응답 형식으로요 그때 당시에 관해 들려주실 수 있나요? 1992년에는 중국어 인쇄물이 금지됐습니다 (네) 나도 인도네시아에 갔는데,중국어로 된 책은 금지됐었어요

그럼 어떻게 강연을 하셨습니까? (영어로 했습니다)

계속 말씀해주세요 헌데 감사합니다 전 정말로 이런 일들은 잊어버렸거든요

스승님이 하신 얘기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현대사학회에 속해 있어서 이야기를 좋아하니 해 주세요

좋아요,하지만 정말 오래된 얘깁니다 난 강연을 끝내고 잊어버렸습니다 만일 어제 내가 한 얘기를 물어본다 해도 생각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떠올려 볼게요 아마 기억이 좀 돌아올 것입니다

무상사님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봅시다

거기 중국 교포들은 정말 비참했습니다 그들의 참상을 듣고 난 울었습니다 하지만 선은 선을 낳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날 중국인들은 괜찮습니다 많이 나아졌어요 신은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하거나 욕하면 우리는 인욕하는 중국인들의 모범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린 알게 되죠 신이 분명히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요 조만간에 신은 일을 바로잡아 줍니다

그 때 중국인은 학교에 못 갔으며 중국어를 배우거나 쓸수없었죠 하지만 집에서는 중국어를 써도 됐어요 우리 동료 수행자 중에 한 명은 아주 부유해서 집이 아주 컸습니다 그는 날 자기 집으로 초대했고 모두들 끼어 앉았어요 그의 집은 아주 커서 여기 만큼 거대했고 방도 아주 많았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중국어를 쓸 수 있었죠 공개 대중 강연에서는 영어를 썼습니다 난 지역의 법도를 위반할 수 없었어요 난 그 나라에 맞춰야 하니까 협조해야만 합니다 그랬습니다 모든 게 순조로웠어요

좋아요,태국으로 넘어갑시다 21쪽을 참조하세요 1994년 태국에서는 왕궁에서 시린돔 공주를 만나셨습니다 그 얘기를 해주세요

내 강연이 끝난 뒤였죠 왕실 가족들이 알고는 우리 동료 수행자들을 접촉해왔습니다 뒷 얘기는 나도 그다지 많이 모릅니다 사람들이 날 초대하면 난 그냥 갑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동료 수행자들이 날 위해 안배하거든요 그들은 내게 말합니다 『스승님! 누군가 초대했는데 내일 이런 목적으로 거기 가시는 겁니다』 시간이 되면 갑니다 만일 시간이 없다면 가지 않겠지요 내가 거기 갔을 때 그 나라에는 일종의 재난으로 고통 받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식료품과 돈을 좀 기부했습니다

담요,스웨터 … 네! 많은 경우에 그 한 번만이 아니고요 아마 왕실 가족들은 우리의 기부에 대해 감사하면서 우리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건 큰 영광이었죠 우린 공주에게 선물을 약간 보냈어요 그들은 나중에 또 한번 방문해주길 원했어요 그 때는 시간이 없어서 사과했습니다 그 때 다른 문제로 내가 바빴거든요 태국 왕실 가족들은 무척 겸손하고 친근합니다 공주는 무척 순수해서 여러분이 만나 보면 좋아하게 될 거예요 그녀는 건방지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은 뭐든 하고 사실 화장도 안 합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정말 좋아하고,나도 그래요 하지만,그 이후에는 내가 시간이 없었어요

22쪽으로 넘어가세요 작년의 태국입니다 태국에서 마지막 활동이 있었어요 1999년 태국인가요

네,하지만 태국에 관한 것은 많습니다 네,태국에 관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것은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총회입니다 세계 채식주의 대회죠 태국에는 어떤 센터가 있나요? 치앙마이 센터를 소개해 주십시오 (정말 많습니다) 치앙마이,치앙라이 방콕인가요,아니면 다른 곳인가요?

우리 센터는 핫야이와 콘캔 그리고 방콕에 있습니다 태국에는 동료수행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태국어를 하고 일부는 중국어를 해요 통역도 괜찮은 편이죠 처음 거기 갔을 때 일부 중국인들은 중국어를 못했는데 나중에 내 강연 테잎을 듣고 배웠습니다 내가 수업료를 내라고 농담을 했었지요 거기 사람들은 무척 자비롭고 훌륭해요 그들은 영적 수행자를 깊이 존경합니다 당신이 수행자란 걸 알면 그들은 무릎을 꿇고 꽃을 바칠 겁니다 매우 겸손한 사람들이죠

이제 싱가포르로 넘어가겠습니다 싱가포르의활동은 이미 1991 년에 시작되었죠

그 주목적은 강연이었어요 사람들이 많아 거리가 들어차서 걸어 다닐 틈조차 없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통로와 계단에 앉았죠 어제도 마찬가지였고요 실은 그보다 더 했습니다 싱가포르 일은 순조로웠어요 싱가포르 정부는 매우 개방적이었으며 국민들은 내면으로 매우 앞섭니다 우리는 곧 환영을 받았어요 그 나라는 매우 깨끗했고 국민들은 준법정신이 강합니다

싱가포르에서는 껌을 씹고 길거리에 버리면 벌금으로 미화 5천달러를 내야 해요 그들은 매우 고귀한 정신으로 수행에서도 매우 굳건합니다 일단 영적 수행을 하면 꾸준히 합니다 말귀도 금방 알아 듣습니다 싱가포르인들은 정말 지혜가 발달했습니다 그 점이 무척 기쁩니다 그곳에서 난 무척 행복했어요

그들이 이해를 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전 아무렇게나 말해요

아무렇게나 말하면 효과가 없던데요

그들은 더 총명하죠

좋아요,필리핀에 관해 말해 봅시다 당신은1991년4월 필리핀에 가셨습니다 싱가포르나 필리핀에 처음 가신 겁니까? 필리핀에서 대해선데 어울락(베트남) 난민들에게 가셨지요 왜 어울락이라고 번역하십니까? 첫 번째 질문은 베트남을 어울락이라고 번역하는 이유이고 두 번째는 마닐라 시민 들이 스승님께 시민의 열쇠와 명예 시민권을 드린 이유입니다 그들이 왜 그랬지요?

누군가가 나에 관해서 그리고 나의 방문 목적을 말했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시장이 우릴 초대해서 열쇠를 주었습니다 열쇠가 예뻐서 기념품으로 간직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열쇠로는 아무 문도 못 열었어요 처음으로 그런 열쇠를 받아서 기분이 좋았죠 그 당시 전 집이 없어서 텐트에 머물고 있었죠 그래도 열쇠를 받았죠 잘 싸서 주머니에 넣어 두었어요 그 후 여기저기서 많은 열쇠를 받아서 나란히 모아 두었더니 좋아 보이더군요 미국에서 몇 개를 받았는데 원한다면 한 개를 줄 수 있어요

그 나라 정부로부터 직접 받으면 좋지만 스승님한테 받는 것도 좋겠어요 아마도요

나눠 갖는 것이 더 좋아요

어울락(베트남)에 대해 계속 말합시다 어울락(베트남)에 대해 더 말씀해 주세요 스승님은 어울락(베트남) 출신이시죠 (맞아요!)

그 당시 저는 어울락 (베트남)난민을 돕고 수용하는 문제에 관해 필리핀 정부와 협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5천명 모두를 수용했고 아직도 필리핀에 살고 있죠 필리핀 사람들은 친절합니다 나라는 가난해도 국민들은 매우 관대하죠 그래서 몇 일 전에 감사 표시로 그 나라를 다시 방문했어요 『어울락』은 베트남의 옛 이름으로 행복이란 뜻이죠 사람들에게 행운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 이름을 씁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좋죠

디자이너로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데 아름다운 이름도 듣기를 좋아해요 그래서『대만』대신에 『포모사』를 쓰기를 쓰는 겁니다 『포모사』라고 쓰는 걸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끼리는 대만이라고 하지 않고『포모사』 라고 합니다 가끔 잊을 때도 있지만

그 당시 어울락 (베트남)에는 수해가 발생해서 2백만 명의 이재민이 생겼어요 이 때 얼마를 기부하셨나요? 그 돈은 어디서 나셨습니까?

오래 되어서 기억이 안나요 얼마나 많은 나라를 도왔고 얼마나 많은 원조와 식량을 제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대부분 우리가 일해서 법니다 옷과 다른 것을 디자인합니다 그 때 다양한 옷을 디자인했어요 지금은 좀 더 비싼 옷을 디자인하죠 그 때는 몇 가지 소품들도 디자인했고 모자와 다른 것도 짜서 팔기도 했어요 수행을 하는 우리는 하루에 한 두 끼니 채식음식만 먹었습니다 옷도 많지는 않고 두 세벌 밖에 없었으며 텐트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번 돈을 저축할 수 있었고 그걸 난민 돕기에 썼죠 또 동료 수행자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돈을 직접 받지 않습니다 원한다면 본인이 직접 재난국으로 보내라고 말합니다

포모사(대만) 동료 수행자들은 필리핀이나 다른 여러 나라에 원조를 많이 해서 포모사(대만)은 구제사업을 잘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포모사(대만) 단체라고 봅니다!

캄보디아에 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캄보디아에서는 그 때 전국민이 알았어요 전국에서 성금이 보내졌으며 우리 단체만이 아니었어요 모든 이들이 조금씩 냈고 쌀 한가마와 그걸 모두 보냈죠 많이 보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정말 기억이 안나요 많았던 것 같은데 몇 톤이나 됩니까? 6천 톤 정도입니다 신문에 보도되었을 겁니다 국민들이 기아선상에 있어서 도움을 주었죠 재난이 너무 오래 지속 되어 굶주리고 있었고 나라가 전쟁이 일어나서 국민들은 살 수 없었죠 이제 괜찮습니다! 우리가 보낸 쌀을 심어 새 곡물을 재배했어요 나중에 총리께서 내게 이렇게 보고했어요 『우리는 스승님께서 보내주신 쌀을 심어 수확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원조가 그 당시만이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도움을 주었지요 지금은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굶지 않아요 그들은 우리에게 매우 감사하며 저도 그들의 단합된 도움에 대해 동료수행자들과 포모사 (대만)의 다른 이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캄보디아에 관해 두 질문이 있습니다 6항목에 1996년 캄보디아선이 써있는데 그걸 설명해 주세요 간략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매년 우리는 시간을 내서 조용히 앉아 내면을 봅니다 부처는 내면에 있기 때문이며 내적인 깨달음을 강화하기 위해서죠 이것이 선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3일,5일 혹은 7일간 모든 걸 내려놓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불성이나 우리 내면의 신에게 집중합니다 이걸 선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매년 다른 나라에서 선을 합니다 마지막은 한 건 태국이었어요 며칠 뒤에 우린 한국에서 또 다른 선을 할 겁니다 우린 세상과 우리 자신을 위해,세상의 평화를 위해 합니다 우리가 함께 하면 힘이 더 강해지며 기도는 더 쉬워지죠 이것이 우리의 선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