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말씀을 보고 계십니다
『영적 수행과 계율』 칭하이 무상사 강연
미국 포틀랜드 오레곤 1991년 3월 3일

신사숙녀 여러분 여러분들께 존경하는 칭하이 무상사를 소개하겠습니다 1 년도 더 전에 한 친구가 제게 칭하이 무상사 님의 강연 비디오를 빌려줬습니다 그 당시,전 이 비디오테이프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른 많은 강연에 제가 참석했으니까요

이 비디오가 다른 강연과 비슷하다고 여겼어요 이 비디오를 보려고 집에 가져간 뒤 전 이 테이프가 완전히 다르단 걸 발견했습니다 스승님의 설명이 아주 의미심장했지요 그래서 전 채식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서 전 입문을 신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스승님의 설명이 아주 논리적이고 그녀가 가르치는 진리가 어떤 종교도 배척하지 않으면서 모든 종교와 조화로웠거든요 입문한 뒤로 전 많은 내면의 변화를 느꼈습니다 또 물질 생활보다 더욱 고귀한 뭔가가 있음을 이해했습니다

제겐 탐험하고 나아갈 더 밝은 미래가 생겼습니다 주위 사람들도 제 이런 변화를 보고 전보다 더 많이 절 좋아합니다 매일매일 물질에 대한 제 욕망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집,돈에 대한 제 욕망은 전과 같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선활동을 더 많이 하고 싶습니다

더욱이 아주 소소한 것이라고 해도,제가 스승님께 구하는 것에 항상 도움을 받습니다 총 12명인 식구들도 모두 입문을 했고 모두 내면으로 좋은 체험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길과 일상 생활에서 우리를 안내할 스승을 가진 걸 행운이라고 느낍니다

오늘, 스승님께서 우리의 초대에 받아들여서 여기 오셔서 모두가 이로울 수 있도록 진리의 가르침을 펴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감사합니다,스승님 이제 칭하이 무상사 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안녕하세요 신사숙녀 여러분 비가 오고 추운 날씨에도 여전히 여기 진리를 들으러 와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어울락(베트남)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적인 미국인들도 진리를 들으러 오셨습니다

내 생각에는 우리 세상과 우린 미래에 대한 희망 세계에 대한 희망, 미국에 대한 희망, 어울락(베트남)에 대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어울락 (베트남) 인들은 영적 수행에 대한 경향이 있습니다 보통 어울락 인들 대부분이 절과 교회를 가거나 특정 법문을 따르고 특정 종교단체를 따르며 수행을 합니다

여기에선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명상과 불교를 연구하지요 그들도 성경을 배우며 종교를 하나 따르거나 지금 현대 시대의 유명한 스승을 한 명 따르고 유명한 법문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내가 왔어요 제자들에게 초대를 받은 것과 별도로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영적 수행에 보다 정진하도록 상기시켜서 우리 세상에 문제와 폭력이 줄어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적 수행에는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또한 선한 사람의 등급도 많이 있습니다 영적 수행에는 수많은 법문이 존재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영적 성취를 얻으려면 금욕적으로 살고 이런 저런 걸 하고 계율을 지키고 부처에게 절하는 등 이런 저런 걸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깨달음은 자연스레 얻어지므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리 금욕적으로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영적 수행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도록 수많은 영적 개념을 발전시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오레곤의 많은 미국인들이 이미 영적 수행에 대해 뭔가를 알았기 때문에 이 강연에 참석하러 왔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것이 그들이 설교자나 영적 수행에 대해 처음 들어본 거라면 그들이 여기 오는 데 많은 관심을 가졌을지 의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안내하고자 공개적으로 영적인 길을 확립해온 모든 스승들에게 공덕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스승들이 제자들의 수준과 그와 배우려고 오거나 진리에 대해 배우려고 오는 사람들의 목표에 따라서 다른 법문을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우리가 채식을 하도록 하고 계율을 지키며 영적 수행에 엄격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스승을 만난다면 그건 우리 가슴이 그걸 원해서 그런 겁니다 우리 가슴은 올바르게 수행하길 원합니다 영적 수행에 엄격하길 원하지요 우리 가슴은 세속적인 추구에의 집착을 줄이기 위해 절제와 계율을 가지고 수행했던 고대 스승의 모범을 따르려고 해요 그건 우리 가슴이 그렇게 원해서 그런 겁니다

우리 가슴은 그런 이상을 좋아하죠 우리는 그런 이상이 매우 높다고 믿으니 그걸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수행에서 희생 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그럼 조만 간에 우리의 이상과 어울리는 스승을 만나서 수행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스승들을 만나면 즉시 그들을 좋아해요 그들이 뭘 말하든 즉시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그건 바로 우리가 늘 원했던 것이며 우리가 기대한 것이며 우리의 이상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또는 예를 들면 우린 진지하게 수행하길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소위 신이 무엇인지 우주가 무엇인지 응보가 무엇인지 자연의 법칙이 무엇인지 천국과 지상의 법칙이 무엇인지 인류 진화의 법칙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우리도 알고 싶어하지만,규칙을 따라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자신을 단련하고 싶어하진 않습니다,채식도 원하지 않지요 우린 할 수 있는 한 수행을 원할 뿐입니다 그게 다지요 얼마나 조금 이해하든 그게 좋다고 간주되죠 우리가 삶을 즐기고 싶어하면서 또한 영적 수행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면 그럼 우린 분명 우릴 그렇게 가르칠 스승을 만날 겁니다

그들도 우릴 가르치기 위해 이전 스승들이나 오래 전 높은 스승들에게서 교리를 가져옵니다 그들은 부처는 열반이 어떻다고 말했으며 예수는 천국이 이렇다고 말했으며 공자는 이렇게 노자는 저렇게 말했다고 하죠 그들도 우리에게 그걸 설명하고 소개하고자 그런 최상의 가르침을 가지고 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여러분이 원하는 걸 모두 할 수 있으며 하고 싶은 대로 탐닉할 수 있으며 바라는 만큼 자신을 풀어줘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신은 관대하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분이 뭘 원하든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부처와 보살은 중생들을 꼬치꼬치 간섭하지 않습니다 이런 두 방법이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왜 스승들 대부분이 엄격하게 조심하며 수행해야 한다고 말할까요? 그들은 진지해야 하고 훈련 받아야 하며 계율을 지키고 채식을 해야 합니다 그럼 높은 수준의 영적 성취를 얻을 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신이 인류를 제한하고 자비롭지 않으며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간섭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승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 없이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까 봐 난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이 둘 다 논리적으로 들리고,좀 비슷하며 여러분이 최고의 목표를 얻도록 돕는다고 주장해도 결국 그들은 똑같습니다 그들도 같은 가르침을 이야기하며 서로 비슷합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규칙과 자기 수양입니다 하지만 규칙과 계율이 있고 채식을 하는 방법이 우리에게 더 많이 이로울 거라 생각합니다 그건 우리를 제어되지 않는 길이나 계율이 없는 길보다 더욱 효율적이고 빠르게 우릴 돕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의 마음은 유한하니까요

세세생생,우리는 이렇게 하는 게 좋지 않고 저렇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도록 세뇌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하는 게 모두 옳다고 믿도록 말을 듣습니다 난 우리가 그걸 인정하지 못할까 봐 우리가 우리 능력을 믿지 못할까 봐 우리가 우리 스승의 말을 믿지 못할까 봐 난 두렵습니다

신이 자비롭지 않고 죄를 용서 않는다고 신은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건 우리입니다 따라서 난 어딜 가든 이렇게 조언합니다 궁극의 목표를 얻고자 수행하길 원한다면 우린 계율을 지켜야만 합니다 우린 채식을 계속 해야 합니다

우린 이 세상에서 인간의 도덕기준에 따라서 일해야 합니다 나중에 영적 수행으로 우리가 더 높은 등급에 오른다고 해도 우린 모든 것을 꿈으로,환상으로 볼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꿈 속에 있는 동안 환영 속에 있는 동안 우린 그 법칙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예를 들어,어울락 (베트남)의 소는 보통 소의 코를 이렇게 꿰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울락에서는 누가 소를 사면 콧구멍 한 쪽을 이렇게 뀁니다 왜죠? 그 소가 고집이 세니까요 그래서 그 코를 이렇게 꿰야 합니다,그리고 코뚜레를 당기지요 그럼 고통이 느껴질 때 그 주인을 따라야 하죠

이 세상에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벌이 없거나 선행을 한 사람들에게 격려가 없다면 그럼 이 세상의 삶과 재산 시민들의 영혼은 위협 받을 테고 죽음을 위협 받을 겁니다 그러므로 업의 법칙이 이 세상을 통제하고 질서를 잡아두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우린 이미 이 세상에 있으니까 코뚜레를 한 그 소처럼 우리가 우리를 끄는 밧줄을 따르지 않는다면 많이 괴로울 겁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다면 우리 코를 꿴 고리를 부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린 말할 수 있죠 『난 자유야 원하는 뭐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아직 못했어요

우린 그걸 끊지 않았지요 여전히 이 세상에 살며 이른바 이 몸의 감옥 안에서 삽니다 따라서 우린 상황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고대부터 세상의 모든 유명한 스승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계율을 지키고 법과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질서를 보호하고 존경하라고 조언해왔습니다

그럼 우린 이 세상을 초월하기 위해 궁극의 목적을 이룰 수 있어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내게 말합니다,언어는 덧없으며,이 삶은 환영인데 왜 당신은 채식과 육식을 구별하며 이런 개념과 법칙을 구별합니까? 난 말했어요 『채식을 먹는 것과 고기를 먹는 게 같다고 말한다면 우리 부인과 다른 사람의 부인이 같은 건가요? 그럼 결혼할 필요가 없네요,그렇지요?

우리 돈이 다른 사람의 돈과 같다면,그럼 우린 돈을 벌려고 일할 필요가 없군요 그냥 돈 많은 은행을 찾아서,거기 가서 돈을 가져가세요 결국 우리 돈이니까요』 우린 그 수준에 이르지 않았어요,그렇죠? 누구든 우릴 치면 우리도 고통을 느끼고 화가 나면서 받아 치고 싶어합니다

예수가 그랬듯이 사람들이 우리의 오른 뺨을 칠 때 그들에게 우리의 왼쪽 뺨을 내 줄 때 비로소 우린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와 예수조차 최후의 순간까지 채식을 했습니다

집에 가서 성경과 불경을 주의 깊게 보세요 그럼 여러분도 이에 대해 알 겁니다 우리가 부처보다 낫고 예수 그리스도보다 낫기 때문에 채식과 육식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육조 혜능은 지금까지 가장 유명한 선 스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영적으로 수행했을 때 그는 여전히 채식을 계속했어요,알겠죠 그는 16년 간 정글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는 사냥꾼들 틈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채식을 계속 했습니다

그 사냥꾼들은 그에게 물었죠『왜 당신은 고기를 안 먹나요?』 그는 자기 위가 고기를 소화 못한다고 했어요 이런 식으로 그는 채식과 영적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육조 혜능은 이미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미 의발을 전수 받았습니다 그건 그가 그의 삶을 보존하고,법을 보호하길 원했거든요 그건 가르침을 펴기에 합당한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그는 정글 속에 숨어야 했던 거였어요 하지만 그는 이미 의발을 전수받았어요 그는 그의 스승인 오조에게서 육조로 확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왜냐하면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숨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 깨닫지 않았기에 우리는 채식과 육식을 차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깨달았고 의발을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여전히 채식을 계속했습니다

또 그 당시 그는 절이 아니라 사냥꾼들과 살았어요 그러니 우린 그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모범을 보였다고 다른 스님들이 그를 괴롭힐까 걱정해서 그의 스승이 그를 욕할까 두려워서 독실한 불자들의 비난을 무서워해서 계율을 지켜야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절에서 산다면 우린 그에게 채식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절에서 사니까요 하지만 육대 조사 혜능은 16년 동안 정글에서 숨어있었고 고기를 먹는 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고기를 먹는 건 보통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냥꾼이었고 고기를 먹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계율을 지켰고 채식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채식이 우리 영적 수행에 아주 이롭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무형의 의식 등급을 얻고자 한다면 그게 없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보통 등급을 제한된 이해와 특정 정도만을 얻고자 한다면 그럼 우리는 뭐든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위대한 지식과 더 명석한 이해를 얻기 위해 우리 몸과 말,마음이 더욱 차분해지길 원한다면 그럼 우리는 우리 몸과 말,마음을 순수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배수관은 뭐든 괜찮습니다 그게 깨끗하든 더럽든 괜찮지요,그걸 수원에 연결하면 물이 나올 겁니다 물이 있지요,그럼 우린 물이 흐르는 걸 보고 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깨끗하진 않죠 때때로 그 물을 우리가 마신다면 우리 영혼에 영양 상 최상은 아닙니다 대부분 그게 우리 몸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배수관이 아주 깨끗한 경우 그 수원에서 흐르는 물을 우리는 바로 먹을 수 있습니다 끓일 필요가 없지요 그건 우리 영혼에 매우 이로우며 우리 몸에 어떤 해도 끼치지 않습니다 비슷하게,우리 몸은 신에게서,신의 기적에서 창조됐지요

우리가 몸 안에 장애를 만들어서 그게 더러워지거나 오염되게 만든다면 그럼 이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서 우리 몸에서 흐르는 신의 생명의 근원도 흐릿하게 될 겁니다 분명 그게 어느 정도로 어두워질 겁니다 그것의 이득도 분명 많이 줄 테고 때로는 이 세상에 그것이 약간은 해롭기도 할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실로 천국과 지구를 알고자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진실로 인류와 세상에 유용한 도구가 되고자 한다면 그럼 몸과 말, 마음을 정화하고 채식을 지키며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를 아주 순수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럼 우리에게서 뭐가 나오든 순수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깨끗이 닦이지 않은 배수관처럼 다른 수원과 다른 배수관처럼 거기서 물이 흐른다고 해도 가장 순수한 정도는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중 누구라도 전에 육식을 했는데 나중에 채식인이 됐다면 그 때 채식과 육식의 차이점을 느꼈을 겁니다

한 번도 채식을 안 해봤고 고기만 먹었다면 그럼 이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채식은 강요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건 채식이 정상이며 필연적인 거라고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맹세라고 우리가 깨닫는 데서 옵니다 그럼 그건 좋지요

어제,내가 12시 자정 경에 막 도착했을 때 난 다른 수행자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한 수행자가 말했어요 날 알기 전에 그녀도 채식을 했지만 한 달에 이틀만 했다고 말이죠 그녀는 매달 30일과 1일에만 채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친구들 모두에게 말했어요 『매달 30일과 1일에 내게 일러줘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릴 거야』 일깨워질 때조차 채식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시계 바늘이 자정을 가리킬 때까지 계속 시계를 보다가 그렇게 되면 즉시 다시 고기를 먹었을 겁니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어요 많이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알 거예요 하지만 날 만나서 내 책을 읽고 우리가 왜 채식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한 뒤에 그녀는 깨어났습니다 이제 그녀는 고기를 욕망하지도 않고 고기를 두려워합니다 고기 냄새가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지요 고기나 물고기 판매대를 지날 때 그녀는 불편해합니다

부처가 된 뒤에는 고기를 봐도 채식과 같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린 괴로워요 우린 그걸 싫어하지만 비판하지 않습니다 잘난 척 하거나 거기 서서 사람들을 꾸짖지 않지요 우리가 뭘 좋아하든 그건 우리의 취향이고 사람들이 뭘 좋아하든 그건 그들 취향입니다

우리가 채식하는 걸 사람들이 알도록 소란을 피워서 불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나쁜 걸 좋다고 간주하거나 좋은 걸 나쁘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가 된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들에게 나쁜 건 나쁜 거고 좋은 건 좋은 겁니다 하지만 나쁘든 좋든 그렇게 내버려두지요 거기 서서 계속 차별하지 마세요

무엇이든 좋으면 우린 그걸 칭찬하고 사람들을 따르도록 격려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이를 칭찬합니다 하지만 어떤 게 나쁘면 우린 여전히 그들이 원하면 따르도록 해요 그들에게 강요하려고 극단으로 안 갑니다 우린 도덕 원칙을 설명할 뿐이지 극단으론 안 갑니다 그게 좋고 나쁨을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악을 고려 안 해서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것이 좋거나 나쁘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악행을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영적 수행자들은 좋고 나쁨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불경을 오해했어요

우리가 선과 악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면 그럼 왜 부처가 살생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술과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율을 가르쳤겠어요? 이는 부처가 선한 길과 나쁜 길에 대해 적절히 가르쳤다는 걸 뜻합니다,그렇죠? 불교도는 열가지 선행을 행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신의 십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어요 선악을 생각하지 않는 건 이미 속세의 선과 악을 초월한 사람들을 위한 겁니다

그들은 사물을 보면 그걸로 다입니다 그들은 비판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들은 꾸짖을 생각도 안 합니다 그들은 누구를 비난할 생각이 없어요 그들은 자비만 쓰지요 그들은 인연이 있고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를 따라 듣길 원하는 사람에게 그걸 설명할 때가 되면 논리만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따르지 않거나 무지한이를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않아요 그게 선악을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부처나 보살의 등급에 올라서 우리 마음이 평온할 때가 『선악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의 좋고 나쁨을 볼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부도덕한 행동을 하게 사람들을 격려하는 건 아닙니다 그 때 그들은 좋고 나쁨을 인과나 응보로 봅니다 그들은 맹렬하게 살인자를 비난하거나 살해된 사람을 바로 동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살생하지 말며 희생자에게 분개하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그들은 그 모든 것이 나쁜 업보임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람들에게 인과의 순환 속에 돌아와 번갈아 서로를 죽이지 말라고 충고해 줍니다

그들의 마음은 살해당한 사람을 편들거나 살인자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걸 두고 『선악을 구별 말라』고 합니다 선과 악은 서로 다른 게 아니니까요 우리가 나쁜 일을 한다거나 남들에게 나가서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과 살인을 권한다는 게 아닙니다 불보살의 경계라 그런 것입니다

아직 그런 경계엔 이르지 못했으면 잘못되게 설명해서 우리가 잘못 이해한 것을 사람들이 따르게 해선 안됩니다 우리 자신의 오해만으로 이미 아주 유감스러운데 우리가 오해한 것들을 남들에게 가르치거나 그들이 우릴 따르도록 온갖 방법을 다해 우릴 따라야 한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예컨대,그들이 우릴 자연스레 따른다면 그럼 괜찮습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거나 남을 강요한다거나 달변을 이용해서 우릴 따르게 한다면 훨씬 더 죄가 무겁죠 이젠 차이점을 알 수 있겠지요 계율이 있는 법문과 없는 법문 사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