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자신이 안회만큼 자비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공자는 때로 자비가 없는 듯, 자비를 져버린 듯, 사람들을 대했기에 안회가 더 자비롭다 한거죠 아마 안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비로웠을 겁니다 결코『아니요』, 『몰라요』, 『안 돼요』라는 말은 몰랐겠죠 이해합니까?

언제나『네,네』 하는 건 자비가 아니라 우둔한 거예요 안회는 매우 자비롭고 자애로웠지만 무애로 대할 때를 몰랐고 진정한 사랑, 더 큰 사랑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할 줄 몰랐죠 그래서 공자를 모셔야 했던 겁니다 이제 내 말을 이해하는군요

공자는 자비를 몰랐던 게 아니라 더 높은 자비를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진정 깨달은 자는 자비롭지 않다고 하는 거죠 그의 자비와 행동, 일하는 방식은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도덕과 자비, 정의와 예절, 지성과 명예의 틀 안에 없지요 이를 뛰어넘습니다 그가 그 틀 안에 있고 싶으면 있고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위대한 대의에 봉사하기 위해 그 틀을 넘고자 하면 넘습니다 자유롭게 드나들지요 우린 대부분 그 틀 안에만 있으려고 하지 어떻게 넘는지, 어떻게 드나드는지는 모릅니다 이해합니까?

우린 그와는 달리 융통성이 없죠 대체로 외골수입니다 나가는 건 알지만 들 줄은 모르고 드나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죠

마찬가지로 자공 또한 말재주가 있어 토론엔 강했으나 논쟁을 말아야 할 때를 몰랐어요 사람은 단순해야 합니다 몰라야 할 때는 모른다고 해야죠 다 알 필요는 없어요 알아야 할 때는 알고 몰라야 할 때는 알 필요 없지요 난 모르면 모른다고 합니다 알 필요 없으니까요 모른다고 해서 죽지는 않아요 난 알아야 하고 해야 할 것은 알지만 몰라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건 신경 쓰지 않죠 예를 들면 그래요

어떤 때에 우리는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죠 어떤 질문에도 척척 대답하는 그런 사람은 많습니다 계속 말하면서 논쟁에서 늘 이기죠 그러면 사람들은 지쳐 그와 논쟁하길 꺼려해요 그렇다고 그가 다 아는 게 아니죠 그저 호기심 많고 남보다 빛나고 싶어해서 모든 걸 알고 이해하려 하는 겁니다 이건 때로 매우 지치고 소모적이죠 이렇게 하면 스스로 되돌려 단순하고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논쟁도 안하고 누가 이기는지 신경쓰지 않죠

오늘 이야기에서 공자는 때론 어눌해야 한다고 했어요 공자는 자공이 말재주가 좋고 토론에 능하나 어눌해야 할 때를 모른다고 했죠 왜 어눌해야 할까요? 말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언제나 이기거나 뛰어날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뛰어나면 남들도 그를 못 견디고 스스로도 못 견딜 거예요 어눌할 때를 모르면 늘 이겨 지는데 익숙치 않게 되고 그러다 지기라도 하면 자살하려 들겠죠 지는 것을 견딜 수 없으니까요 이런 사람은 너무 융통성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선 완전히 완벽할 수 없죠 완벽치 않은 것이 곧 완벽입니다 즉,언제 뭔가를 하고, 언제 논쟁을 하며, 언제 눈과 귀를 닫고 논쟁을 말아야 하는지 알아야 하죠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면 이완하고 평온할 수 있죠 언제나 호인이 되어 좋은 말만 들으려 하고 무엇이든 논쟁을 한다면 너무 지루하고 고지식하며 끝이 없고 재미없죠 항상 똑같으려고만 하면 재미 없어요

공자는 이어 말하길 『유(자로)는 매우 용감하지만 약해지고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했죠 우린 가끔 약해지고 두려워 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정말로 그래야죠

일을 할 때 너무 쉽게 흥분해선 안됩니다 겉으로 영웅인지 판단해선 안되죠 과거나 현재 중국인들은 이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쿵후 수련자나 쿵후 스승은 사람들에게 실력을 아무때고 자랑해선 안된다고 했지요 더 못 참을 때까지 참아야 하며 방어를 위해서만 반격할 수 있고 아무때고 결투를 신청해도 안 되죠 타인이 도전해와도 그냥 달려가서 쿵후 실력을 드러내선 안됩니다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쿵후 실력이 없어서도 아니죠 참는 것이 진정한 쿵후입니다 가급적 때리지 않는 것이 좋아요 물론 그래야 할 때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아무때나 과시하며 두려울 이가 없고 실력과 재능과 힘이 있다고 알리려는 게 아닙니다 알겠어요?

이 세상에선 스승도 자연스럽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겸손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죠 석가모니불처럼요 그에게는 신통이 많았지만 사람들이 겨루려 하면 그는 거절했죠 예수도 많은 신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허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알고 중생구제를 위해 고통 받았죠 순순히 못을 박게 놔둔 겁니다 도망갈 수 없었던 게 아니죠 도망갈 수 있었어요 신통을 쓸 것도 없이 많은 제자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는 이미 그 전에 알고 있었어요 몰랐던 게 아니죠 군중 속에 숨으면 누가 찾을 수 있었겠어요? 예로, 당시는 주민등록증이나 여권, 비자가 없어서 도망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요 석가모니불도 신통으로 사람들을 이길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죠 내 말 알겠어요?

우린 용감하고 용기를 가져야 하지만 무턱대고 써서는 안됩니다 보이려는 건 아니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써야죠 살인은 안 하나 겁줄 수는 있어요 사람들이 우릴 죽이게 두지 마세요 나쁜 업을 짓게 만들고 귀한 생명을 잃으니까요 그건 좋지 않죠 그것이 진정한 용기고 지혜입니다 언제라도 자신을 다치게 둬서는 안됩니다 남이 우리를 해하게 둔다면 그들은 거기 익숙해 질 테니 좋지 않죠

사(자장)에 대해 계속 얘기해 볼까요 공자는 말하길 사는 더 엄격하고 근엄하나 언제 사람들과 편하게 섞여야 하는지 모른다고 했어요 왜일까요? 수행자는 항상 근엄하고 차분해야 하지 않나요? 왜 공자가 편하게 사람들과 섞여야 한다고 했을까요? 사람들과 섞이면 체면을 잃지는 않을까요? 그런가요? 남들과 같으면 어떻게 존경받죠? 그렇게 될까요? 그렇게 된다해도 어쩌겠어요? 그렇죠? 사람들의 감정이나 친한 친구가 체면보다 중요합니다 위엄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죠 어쩌겠어요? 그렇죠? 사실 위엄이 있든 없든 상관 없어요 내면의 힘과 안정이 있는 한 사람들은 우릴 좋아하고 존경할 겁니다 우리가 그들과 섞여 있거나 큰 강단 위에 따로 있거나 간에요 알겠어요?

때로 커다란 강단에 남들과 떨어져 홀로 위엄있고 고요해 보이려 한다면 먼저 상처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홀로 쓸쓸히 친구가 없을 테니까요 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지요 자신을 새장 안에 가두고 아무도 근접 못하게 하며 감히 다른 이를 가까이 못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죠 살긴 살지만 좀 힘들게 삽니다 사는 법을 모르는 거죠 공자만이 아니라 나도 종종 수행자는 꾸밈없이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연스러운 게 정말 좋죠 자연스레 자신의 길을 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공자는 순리대로 과함이 없는 게 좋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죠 너무 좋은 것도, 너무 나쁜 것도 좋지 않습니다 중도가 필요하죠 중도는 바로 그런 겁니다 이것이 공자의 중용이죠 그렇지요? 『중』은 중간을 『용』은 적당함을 의미합니다

불교도 중도를 걸으라고 하지요 그렇죠? 어느 쪽에나 치우치지 말라고요 수행하지 않는 이들은 이러한 중도의 정신을 이해 못하며 중도의 마음가짐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증오하는 사람은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죠 죽이는 건 쉬우나 그 생각을 바꾸긴 어렵습니다 허나 바뀌면 영구하죠 살생은 영원치 않죠 한 사람을 죽이면 그 부인과 자식이 복수할 겁니다 수많은 생을 이렇게 서로 죽여서 뭐가 좋겠어요? 증오만 더해져 전쟁이 일어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겠지요 그래서 공자는 『중용』과 중도를 지키라고 한 겁니다

서커스의 곡예사처럼요 그는 줄 위를 걸으며 항상 곧바로만 가지 않아요 때로는 오른쪽으로 때로는 왼쪽으로 가야 하죠 그렇죠? 균형을 잡기 위해서요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탈 때도 때론 오른쪽으로 때론 왼쪽으로 가야 합니다 운전하는 것도 이와 같죠 그렇죠? 곧바로만 갈 수는 없어요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해야 자동차가 중심을 유지하며 달릴 겁니다 참 이상하죠

삶도 이와 같습니다 영적인 수행을 하든 안하든 이런 식으로 살아야죠 좌우로 치우쳐선 안되며 극단적이거나 뭔가를 심하게 혐오하거나 싫어해서도 안됩니다 양쪽 다 좋지 않지요 그러면 우리의 감정과 마음이 아주 격렬하고 강하게 거기 묶이기 때문입니다 거기 집착하면 벗어나거나 다른 것을 하지 못하죠 자유롭지 못해요 알겠어요? 마치 쇠사슬에 묶여 그 주변만 돌아다니고 멀리 가지 못하는 것과 같죠 그러므로 처신에 있어 관대하고 응변에 능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대처해야죠 너무 완고해서는 안됩니다

성불을 하고 안하고는 내면의 갈망과 바램에 달렸어요 내면의 스승이 깨어나 관리하려 하면 아무도 그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주변에서 유혹할 수 없지요 억지로 강요하는 건 더 안 좋아요 그의 내면엔 부처가 있으니까요 부처가 놀겠다는데 어떻게 힘으로 막겠어요? 어리석고 싶으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난잡한 일을 하겠죠 어리석고 싶지 않으면 깨달음을 원하고 스스로 일어나 스승이 될 겁니다

이 모두가 자신의 계획이며 의도된 바죠 남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부처를 잡아다 가르치겠어요? 안에서는 여전히 저항할 텐데요 돌아가길 원치 않으면 계속 놀 겁니다 뭐라 할 수 없죠 그는 자신을 알며 고의니까요 부처가 어찌 모를 수 있겠어요? 마치 대통령이나 왕처럼 궁전에 있을 땐 주위에 시종들이 있고 황금 식기에 옥젓가락,양탄자, 금과 진주보석이 박힌 온갖 것들이 있지만 때로는 밖에 나가 놀고 싶어하죠 첸룽 황제가 밖에 나가 길거리의 두부를 사먹듯이요 때로 그러면 남에게 당하기도 하죠 이를 테면 강도를 당하거나 옥새를 도둑맞거나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거기 서서 이렇게 말할 순 없어요 『나는 황제다 그러니 그만 둘지라 아니면 하옥시키리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죠 아무도 모르게 돌아다니고 싶었으니까요 자신의 정체를 들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그런 거죠

악한도 부처입니다 일부러 부도덕한 일을 하며 이런 일을 좋아하는 거예요 하지만 때가 되면 돌아올 겁니다 돌아오길 원치 않아서 겪는 고통은 그의 몫이죠 첸룽 황제처럼요 그는 궁전으로 돌아와 황제가 되길 원치 않았어요 정체를 드러내길 원하지 않았죠 밖에서 남에게 당하기도 했지만 그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어요 궁전으로 돌아가 황제가 되어 영광스런 지위와 삶을 즐기고 싶지 않다면 그건 그의 몫이죠 강요할 수 없어요! 같은 왕끼리도 궁으로 돌아가게 강요할 수 없죠 이해합니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안하는 거니까요 그러니 무엇이든 상황에 따라 재치있고 융통성이 있게 해야 한다는 걸 기억하세요 우린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고 책임져야죠 제대로 책임져야 해요 알겠죠? 책임진다는 건 아내라면 아내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남편이라면 남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거죠 내면의 이해가 있는 걸로 좋습니다 그렇죠?

두 선사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나요? 한 스승은 먹은 적 없다 했고 한 스승은 혼인 안해도 아이가 넷이었죠 기억해요? 한 스승은 매일 음식을 공양 받으며 먹은 적이 없다고 했고 한 스승은 옆에 네명의 아이와 처가 있는데도 여자가 뭔지 모른다고 했어요 이해합니까? 중요한 건 행동이 아니라 내면의 이해죠 그렇다고 돌아가 스승이 그랬다며 허튼 짓을 하면서 중요한 건 행동이 아니라 이해라 했다고 하지 마세요 내 말을 잘 이해해야 해요

내 말은 잘 이해하면 행동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말로 『나는 잘 이해 했으니 마음대로 하겠다』고 할 순 없죠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요 이해 했는지 아닌지는 내면으로 알 뿐 아무도 판단할 수 없죠 그러니 자신이 한 말, 자신이 한 일, 자신이 한 행동을 변명할 필요 없습니다 내면으로 이해하는 한 괜찮죠 이해하지 못한다면 온 세상을 설득한다 해도 괜찮지 않을 거예요 스스로도 괜찮지 않은 것을 알죠

우리에겐 여러 품성이 있어요 달고,시고,맵고 쓴 모든 품성은 다르게 반응할 필요가 있기에 신이 주신 거죠! 달콤한 성품 만으론 충분하지 않아요 영양이 충분치 않죠 매일 설탕만 먹는다면 그게 충분하겠어요? 영양이요? 다른 음식도 먹어야죠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는 한 품성이나 자신의 좋은 면에만 집착하고 괜찮다고 생각해선 안되죠 거기 멈춰 아무도 당신을 볼 수 없게 숨어 버리면 성장하지 못하고 늘 그런 상태로 머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