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우리의 친척이, 전생의 연인, 친척 적들 일 수도 있죠 그렇게 모두가 싸우려고 다시 돌아오죠 싸우지 않을 수도 있어요 누가 전에 다른 이의 팔을 부러뜨렸다면 이번 생에 그는 팔을 부러뜨린 사람과 결혼을 합니다 전에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평생을 그 사람을 돌봅니다 그게 전부죠 인과 때문이죠 그들은 서로에게 점점 더 집착해 새로운 감정을 갖게 되죠 새로운 감정이나 업장을 갖게 되죠 즉 새로운 관계나 새로운 인과관계죠 그들은 서로에게 갚기 위해 다시 윤회해야 합니다 한 번에 갚기엔 충분하기 않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서로 갚고 나서도 또 다시 서로에게 갚아야만 하죠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요 그래서 다시 갚기 위해 되돌아 와야 합니다 물론 얼마나 갚았는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갚기 위해 계속해서 돌아와야 하죠

예를 들어 여러분이 나를 보러 여기 왔어요 나중에 서로 사랑이 깊어져 문에서 내가 여러분과 헤어질 때 날 혼자 보내고 싶지 않을 거에요 그래서 나와 함께 동행합니다 나중엔 내가 다시 동행해야죠 만약 서로가 이렇게 계속 한다면 언제 그걸 끝낼 수 있죠?

모두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기지만 신이 일체를 돌보시죠 풀과 나무조차도 그분이 지으셨죠 어찌 돌보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일은 자연히 처리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보라, 들에 핀 작은 백합도 신이 돌보신다 신의 영광이 그 속에 있으니 너희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신의 권능과 영광이 우리 안에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 이해합니까? 신은 우리가 하는 것보다 사람을 더 잘 돌보시죠

우린 서로 너무 집착하기에 일을 잘 해내지 못합니다 더 많은 업장을 만들고 감정이 더 깊어져서 갚을 게 더 많아집니다 정말 끔찍해요

모두들 이 얘기를 알 겁니다 수행을 잘 하는 한 부부가 있었어요 어느 날 남편이 죽었죠, 맞죠? 그랬어요 그는 죽어야 했지만 그의 아내는 너무 슬퍼서 그의 얼굴을 잡고 울었어요 그의 영혼이 몸을 떠날 때 그녀의 콧속으로 들어가서 콧속에서 벌레가 됐어요, 맞죠? 아내의 코는 돌연 부어올랐고 어떤 약으로도 고칠수 없었죠 하루는 그녀의 스승이 왔어요 한 스님이 왔죠 남편의 스승인지 그녀의 스승인지 모르겠어요 아마 그녀는 불교가 됐었을 거에요 스승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에게 물었어요 그녀는 남편이 죽었고 코가 부었으며 낫지 않는다고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고 벌레가 나왔어요 그러자 스승은 얘기했죠 “남편은 이제 생사에서 해방되었어요” 그제서야 남편은 정말로 죽었고 아내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죠 알겠어요?

나는 수도 없이 여러분에게 인간의 감정은 사람을 묶고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며, 사람들을 구할 수 없다고 말해왔어요 사람들이 서로 붙어있어야 서로를 잘 돌볼 수 있다면 석가모니 부처는 부모를 떠나지 않았겠죠 아니면 적어도 깨달은 후에는 궁으로 돌아가서 돌아가실 때까지 부모님을 모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죠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만 궁으로 가서 자식으로서의 모습을 보였죠 물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는 관습에 따라 행해야 했어요 아마도 궁 근처에 있었기에 궁으로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거예요 멀리 있었다면 가지 않았겠죠 그건 다른 이야기예요 그가 집에 머물며 부모를 모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면 그 자신은 실수를 했더라도 독자인 라훌라는 그러지 못하게 했을 거예요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는데 그에게 왔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까?

부처는 깨달았어요 자신의 길이 좋지 않았다면 아들이 따르게 했을까요? 이 길에서 고통을 받았다면 아들이 이 길을 따라 고통 받게 했을까요? 여러분 자신이 불교도라면 부처가 했던 것과 똑 같이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와 똑같이 해야 합니다

하루는 어머니와 누이가 만나러 와서 밖에 앉아 예수를 기다렸죠 사람들은 예수에게 고했어요 “어머니와 누이가 찾아왔어요” 그는 모른척하며 말했죠 “누가 내 어머니고 누이죠?”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요? “내 친척과 친구는 나와 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는 진정 그렇게 말했죠 그러니 기독교인이든 불교도이든 그와 같이 행해야지 회피해선 안 되요, 좋아요

모두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묶인 겁니다 사실 우린 전혀 책임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육체가 있으므로 신께서 우릴 쓰고자 하시면 그냥 쓰는 겁니다, 알겠죠? 예로, 신은 이 나무를 사용해 우리가 그늘을 즐기게 합니다 땅을 만들어 걷게 하고 그는 나무 등등을 만들었죠 우리의 육체를 활용해 뭔가 흥미로운걸 하게 하는 거죠

깨닫고 나면 자신의 운명을 알 겁니다 공자도 예순이 되기 전엔 자신의 숙명을 몰랐어요 노자는 아주 늙어서야 미련 없이 떠났습니다 그 전엔 자신이 이 세상에 책임이 있다고 느꼈죠 후에야 전혀 책임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나려 할 때 그의 제자가 그를 가두고 책을 쓰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고 했죠 그래서 그가 도덕경을 쓰게 됐던 겁니다

사람들은 단지 책임감 때문에 생사윤회를 합니다 사실 우린 책임이 없어요 모든 건 신이 행한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얼 할 때 결코 이렇게 생각할 수 없죠 왜냐하면 에고로 행하면서 가끔은 신의 의지를 모르니까요 그래서 무얼 하든 간에 성공하지 못하고 아무도 우리 말을 듣지 않아요 그럼 비참해지죠 책임감은 아무것도 아니죠

내가 여기에 살고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쓰는게 내 책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전혀 그럴 필요 없어요 몇몇 제자에게 근처에 거주하며 뜰을 쓸게 할 수도 있어요 난 아마도 내 책임이라 여기고 뜰을 깨끗이 청소하려 할지도 몰라요 어떤 이는 그걸 의무로 여기며 자신을 비범하게 여길지 모르죠

저기에 개가 있어요 어떨 땐 아무도 오지 않아도 짖고 으르렁 거리죠 그게 자신의 책임인 거예요 이해하겠어요? 누가 온다면 개가 짖는 건 말이 되지만 아무도 없는데도 짖어요 지루하다고 느끼면 짖어대죠 안 그러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 사람들이 개로 알아주지 않죠 그래서 짖어야 하죠

고요하고 평화롭게 앉아 있는데 모기는 우리를 물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고 생각하겠죠 그들은 모기로서의 책임을 다한 거예요

호랑이도 토끼를 보면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잡아 먹으려고 하잖아요?

모두 자신에게 책임이 많다고 생각하죠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책임이 있다는 거죠? 이런식으로 늘 자신을 속이며 우리는 세세생생 한 구석에 묶여 있어요 우린 심지어 억지 논리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단점과 무지를 덮고는 그걸 깨려고 하지 않습니다 안 된 일이죠! 자신이 없으면 세상이 끝난다 생각합니다 등급이 아주 낮은 거죠

“천하본무사”라는 말도 필요 없어요 도덕경을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노자의 책을 읽으면 머리만 아플 거예요 도덕경을 비난할 겁니다 우리의 터무니없는 기운이 도덕경을 오염시키니까요

공자나 장자의 책을 읽을 때 우린 웃으며 이해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자신을 점검하며 스스로를 동정해야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무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이해하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무지한 거예요 우리가 알면 무지하지 않겠죠 내 말 뜻 이해하겠어요?

자신의 무지를 인정 안하니 절망적인 겁니다 자신이 무지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내면의 불성이 나와 우릴 구하지 않는 거예요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무시하니 그가 잠든 겁니다 불성은 자유로워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아요 불성은 묻지 않으면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도 매우 즐거웠어요, 왜죠? 작가는 인도사람인데 1950년에 죽었어요 그는 인도에서 살아있는 부처로 여겨지며 유명했죠 그는 나가서 강연하지 않고 자신의 거처에 머물렀는데 사람들이 찾아와 존대했죠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왜 기분이 좋았을까요? 그건 이 스승을 보러 왔던 사람들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들 중에는 매일 그 스승 곁에 있는 한 제자가 있었어요 그는 청중이 아니라 스승을 위해 통역하려고 매일 거기에 갔어요 그는 영어와 많은 지방어를 알았어요 그는 자주 거기에 가서 사람들을 위해 통역했어요 사람들은 그에게 그들의 질문에 스승이 답한 것을 적어달라고 했죠 그는 그걸 적어줬어요 왜 내가 기뻤을까요? 거기엔 “제 병이 어떻게 나을 수 있을까요?” 따위를 묻는 이가 없었거든요 그들은 전부 수행에 관련된 질문만 했어요 스승은 그런 질문을 들으면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많은 얘기가 있지만 이런걸 묻기도 해요 어떤 사람들이 그 스승에게 어떻게 제자를 축복하는지, 그에게 진실로 축복의 힘이 있는지를 물었어요 스승의 축복이 필요한지 스승이 정말 축복의 힘을 가졌는지 물은 거죠 그 스승은 종종 말했죠 “스스로 수행해야 합니다 난 줄 게 없어요” 라고요 모든 스승이 그렇게 말하지만 때때로 이 스승은 잊고서 스승이 지닌 축복의 힘도 효력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는 진실을 말하는 데 익숙해서 무심코 흘린 거예요 가끔 뭔가를 흘리곤 했죠

그 스승이 말했죠 “세 가지 축복이 있어요”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으니 올 필요 없다 그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니 스스로 수행하라고 말하고 했죠 하지만 그들은 계속 질문했죠 “모든 경전에 말하기를 스승과 스승의 축복이 우리에게 효력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니면 올라갈 수 없다고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그 스승이 마지못해 말했죠 ”세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축복한다고 말하지 않았죠 그의 제자들은 간혹 스승이 축복한 걸 알았죠 그 스승은 누군가를 축복할때 그걸 내보이지 않았죠 외부인들은 알 수 없었지만 제자들만 알았나 봐요 그 스승이 말했어요 “세 가지 축복 중 첫째는 눈으로 보는 것이죠” 그는 분명히 말했어요 “둘째는 손이 닿는 것이고 셋째는 생각하는 겁니다” 내면으로 생각함으로써 축복이 전해집니다 그는 또한 생각이 소통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말했죠 모두 그걸 할 수 있진 않죠

이 책에는 좋은 이야기가 많아요 시간이 나면 읽어줄게요 내가 이 유명한 스승이 매일 어떻게 지냈는지, 그가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고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며 어떻게 그들과 어울리며 살았는지 알려 줄게요

그는 종일 아무것도 안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나서 산책을 하며 운동을 좀 했어요 그리고는 잠자리에 들었죠 제자들이 보러 오면 함께 모여 앉았지요 그들은 그가 앉아 있으면 종도 안쳤는데 함께 모였어요 그들에게 종을 치는 전통은 없었어요 그저 자연스러웠죠

하지만 그에겐 매주 모이는 우리처럼 많은 제자가 있는 건 아니었죠 그들 단체는 작았지만 매일 모였어요 여기 우리처럼 많지 않았어요 거기엔 출가한 이들이 수십 명 있어서 스승이 앉아있는 걸 보면 함께 스승 옆에 앉곤 했죠 그가 밖에 나가 강연하거나 다른 걸 안 했기 때문에 산책을 한 후 돌아와 거기에 앉아있던 거죠 아마도 신문이나 경전들을 읽었겠죠 사람들이 그에게 경전에 대해 질문하면 답해주고 영적 수행에 대해 질문하면 상황에 따라 답해주었어요 그리곤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잡니다 오후에는 다시 산책을 하지요 제자들이 동행하기도하고 혼자 가기도 하죠 돌아온 후 저녁을 먹고는 잠자기 위해 눕습니다 때로 제자들이 모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그는 그렇게 살았어요 매일 그렇게 살았습니다

누군가 제자들에게 물었죠 “저 사람이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하나요? 왜 위대하다고 생각하죠? 그는 매일 먹고 잠자고 산책만하고 아무 것도 안 합니다” 이해하나요? 그는 매우 귀여웠죠 그는 상체에 아무 것도 입지 않았어요

전에 그 사진을 봤지요 지금은 없어요 그에대한 다른 책도 읽었어요 지금은 없지만 전에 읽었습니다 난 세계를 여행할 때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그냥 거기 남겨뒀어요 책을 모으지 않았지요 아니면 책이 많았을 거예요

그는 속옷으로 입는 천 한 장 말고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았죠 인도인들은 천 한 장으로 몸을 감싸는걸 좋아하죠 부끄러우면 이렇게 천 한 장으로 상체를 감쌉니다 알겠어요 상체의 반만 감쌉니다, 알겠어요? 가운데를요 그 때 옷을 가장 많이 입었죠 여자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때 그렇게 입었어요 아니면 속옷만 입었죠 그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그는 어릴 때부터 수행을 시작했어요

책에 흥미로운 얘기가 있어요 22살 이었을 때 그는 약간의 고행을 했어요 어떻게 하게 됐을까요? 고의로 하진 않았어요 그는 세속의 사랑을 버리고 가족을 떠났죠, 알겠어요? 그는 결혼하지 않고 명상하러 동굴에 들어갔죠 그 당시 그는 말랐어요 많이 먹거나 자지 않았죠 그는 매우 말랐어요 그를 보면 아이조차 울며 그를 동정했죠 어느 날 8-10살쯤의 아이가 큰 소리로 울며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그의 이름은 “바가반”으로 신을 의미합니다 그는 진짜 바가반 이었죠 사람들이 바가반으로 부르니 그 아이도 바가반이라 불렀죠 본명은 “라마나 마하리쉬 바가반” 입니다

그 아이는 그에게 물었죠 “라마나 바가반! 왜 사서 고생을 하죠? 왜 집에서 살지 않죠? 너무 말랐어요 젊고 잘생겼는데 너무 고통 받는군요” 바가반이 말했어요 “나는 집에 머물 수 없다 난 가족과 문제가 있어서 여기 오게 되었단다” 아이가 말했죠 “더 이상 고통 받지 마세요 제 사장님에게 소개해 줄게요 열심히 일하면 하루에 2달러를 줄 거에요 그러면 먹고 마실 수 있죠 좋다면 말씀 드릴게요” 바가반은 “좋다”고 했죠 아이를 기쁘게 하려고요 매우 귀엽지요 그가 귀엽지 않나요? 물론 그는 일하러 가지 않고 수행을 하고 있었죠

어느 날 그는 여전히 거기서 고통 받으며 뼈만 앙상했죠 그 아이는 물었어요 “어디서 음식을 구하세요” 바가반은 말했어요 “누가 음식을 주면 먹고 주지 않으면 안 먹지” 그래서 그 아이는 그가 음식을 먹도록 사장에게 소개하려 한 거죠

어느 날 노부인이 왔어요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그를 꾸짖었어요 “참 어처구니 없고 어리석고 지독하구나 왜 여기서 그렇게 지내는지 난 참을 수가 없구나” 그녀는 그의 고통을 못견뎠죠 “왜 집에 살며 남의 기분을 편하게 해주지 않니?” 그녀는 계속 꾸짖었지만 그는 참았지요

때로 사람들은 남의 일에 간섭을 해요 그래서 때로 수행에 장애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채식을 하면 사람들은 이유를 묻고 문제를 일으킬 겁니다 명상을 하면 우리에게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하지요 내면으로 진실로 행복하면 우린 아무 문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