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스승과 제자사이”는
영어, 독일어, 불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어울락어(베트남)
이태리어,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어, 서반어 자막과
중국어 방송입니다
포모사는 작은 섬이지만
경이로운 자연의 장관이
펼쳐진 축복 받은 땅입니다
북부에는 고대 도시들과
토착 부락들이 우뚝 솟은
산과 아름다운 폭포,
정교한 사원들을 따라
자리잡고 있습니다
중부는 반짝이는 바다,
굽이치는 강물, 초록의
숲 등 다양하고 아름다운
경치로 가득합니다
포모사의 문화 중심지로
알려진 남부는 대륙에서 온
이민자들이 처음 정착할
당시의 전통이 상당 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음법문을 수행하는
포모사는 경제적 독립과
국력으로 국제적 관심과
존경을 받아 왔습니다
부지런히 영적 수행을
함으로 이 땅은 발전하고
풍요롭게 되었습니다
수행자들의 신실함을
통해 포모사는 평화로운
국가의 축복과
공덕을 만끽합니다
최근에
칭하이 무상사께서는
협회회원들의 간절한
바램에 대한 화답으로
명예 손님들과 만 명의
회원들과 함께 2007년
2월 18일 포모사에서
열린 돼지해의 음력 설날을
축하하는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이 상서로운 날에는
빛나는 세계 지도자 상
시상식이 개최되었으며
칭하이 무상사께서는
필리핀 피델 라모스
대통령과 마뉴엘 모라토
구시 평화상 협회 회장,
그리고 헤에슨 알바레즈
상원의원에게 필리핀에서
베트남 난민들에 베풀어 준
자비로운 노력에 대해
시상하셨습니다
이 시상식에 이어
국제선이 개최되었고
선 기간 동안 칭하이
무상사와 협회 회원들은
세계 평화를 위해
명상하고 기도했습니다
2007년 2월 22일
칭하이 데이에는
화려한 팡파레와 아름다운
축하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1990년 11월 4일
칭하이 무상사의
포모사 시후 강연
“신실하게 기도하면
모든 것이 성취된다”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오늘 스승과 제자 사이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은 이 감동적인 강연의
결론이 방영됩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이어서 동물의 세계:
더불어 사는 세상이
수프림 마스터 TV에서
방영됩니다
오늘 스승과 제자 사이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은 또 다른 깨달음의
강연이 방영됩니다
이어서 건강한 삶이
수프림 마스터 TV에서
방영됩니다
신실하게 기도하면
모든 것이 성취된다
포모사 시후
1990년 11월 4일
우리는 가끔 다른 집
아이들이 훔치는 걸 봅니다
신문에선 아이들이 이런저런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도하죠
하지만 우린 그저 한숨만
짖고는 즐겁게 다른 일을
하며 아이들을 신경쓰지 않죠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작은 실수를 저지르면
잠을 못 자요 그렇죠?
우린 “난 나쁘지 않은데
아이가 왜 그러지?’하며
의아해 하며
교육을 잘못시킨 것 같아
슬퍼합니다
잠을 잘 수도 없죠 그렇죠?
다른 아이들 잘못에 비해
우리 아이들 잘못이 아주
소소한 거라 하더라도
예를 들어 다른 아이들이
아주 나쁘다면요 아이가
아주 작은 실수를 하더라도
우린 심하게 혼을 내죠
우린 엄하게 훈계를 하고
마음 아파 합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살인이나
절도를 하면 우리와 상관이
없다 느끼죠 그렇죠? (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린 “그래?” 라고 말하죠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으면
한숨을 지으며 “저런!”
이라고 하는 게 전부죠
어떤 때는 한숨조차 짖지
않고 그저 무시해버리죠
걱정스럽거나 마음 아플 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작은
실수라도 하면 그때는 다르죠
진실로 순수하다면 출가후
시험 받지 않죠 아무도 신을
우롱할 수 없으니까요
부처의 눈은 밝습니다
이해해요?
누가 부처죠?
그는 우리의 양심이죠
그의 눈은 매우 밝아서
우리는 그를 속일 수 없죠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있죠
아무도 지옥에 안 간다면
지옥이 왜 만들어진 거죠?
선한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없으면 천국이 왜 있죠?
체험이 없을 때가 실제로는
가장 좋은 체험이죠 왜죠?
오만 할 수 없기 때문이죠
적어도 위험에 빠지진 않죠
오만한 마야로부터
신이 우리를 보호합니다 맞죠?
오만한 마야는
통제하기가 가장 힘들죠
미친 사람이나 신들린 사람,
정신지체가 있는 사람
대부분이 아주 오만하죠
그들과 얘기해보면 알수 있죠
그들은 다른 이들을 하찮게
여기며 나에게 또한 그렇게
생각하죠 그들 모두가 그렇죠
오만한 마야에게
신들렸기 때문에
아주 오만해진 거죠
어떤 것을 이해하고 나면
그것에 집착하게 되죠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해서
맹목적이고 무모해지죠
그래서 그들이 미치고
문제가 생기며
오만한 마야의
조정을 받게 되죠
정상적이어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죠
그러니 체험이 없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게 더 좋습니다
무해한 것이 더 좋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데
어떻게 누굴 해치겠어요?
무지하고 체험이
없는 우리가
칭하이 스승에게 온 후로
체험을 한다면 좋은 거죠
체험이 없어도 잃을게 없죠
적어도 우린 오만해지지 않죠
다른 사람들이
체험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더 아프고 더욱
겸손해져서 더욱 기도하죠
결국에는 체험을 할거예요
때로 신은 우리와
오랜 시간 놀이를 합니다
그는 침대에 있길 좋아하고
어떤 이들과는 보다 이완되고
어떤 이들은 좀 더 시험하죠
하지만 결국에는 체험을 줄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거죠
결국엔 똑같아 질 거예요
때로 신은 모든 체험을
모아 두었다가
마지막 순간에 줍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매일 조금씩 주죠
이는 은행에
돈을 예금해 두었다가
어느 날
모든 돈을 찾아 큰 집을 짖거나
세계여행을 하거나
큰일을 하는 거와 같아요
하지만 어떤 사람은 매일
조금씩 돈을 찾아 쓰지요
이는 원하는 바에 달렸어요
어느 쪽이든 할 수 있지요
체험이 없다 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수녀가 한 명 있었어요
스페인 사람인데
전에는 매우 유명했어요
그녀는 체험이 많았을 거예요
그녀는 영적 수행이나
명상을 열심히 했어요
그녀가 책을 썼는데
명상에 대해서 언급했어요
그녀는 평범하지 않았죠
그녀의 단체는 명상하고
밀교법을 수행했어요
그녀는 수행하면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
자서전에 썼어요
수녀로서 그녀는 많은 고생을
했어요 때로는 욕구와
탐욕과 분노와 열정이
표출되었어요
때로는 오만하였고
때로는 겉으론 좋아 보였지만
내면은 나쁜 것들로 가득했죠
그녀는 이런 것들을
두꺼운 책에 썼어요
그녀 자신의 나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썼어요
직접 쓴거죠
그녀는 좋은 것은 거의 쓰지
않고 나쁜 것만 썼어요
그럼에도 그녀는 성인이 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죠
그녀는 지금도 유명해요
카톨릭에는 성인이
많지 않죠 여자 성인은
더욱 적고요
그녀는 신이라 여겨졌죠
이해해요?
모두가 그녀를 인정했기
때문이죠 그건 드문 일이죠
그녀는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였죠 사람들은 그녀를
“성녀”라 불렀죠 이는 그녀가
수준이 높고 내면의 체험이
있음을 의미하죠 책에서
그녀는 수행한지 십삼-사 년
후에야 신이 그녀에게 체험을
주셨다고 썼습니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체험도 없었죠
그녀는 다른 이들이 매일
체험하는 것을 부러워했어요
하지만 신은 그녀를 매일
위로했죠 그녀가 말했어요
체험은 없었지만 신은 그녀를
매일 위로해주셨다고요
십사 년 동안 수행한 후에야
신은 그녀에게 체험을 주셨죠
이는 누구도 정말 나쁘거나
희망이 없지 않음을 보여주죠
우리의 겸손과 신실함을
유지하는한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죠 분명 언젠가는
원하는 것을 얻을 겁니다
원하는 것을 조르지 마세요
우리는 겸손해야 되요
너무 고지식하지 말고요
우리는 계율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한다면
계율을 지키라’고 하셨죠
그랬죠? (네)
석가모니 부처께서 세상을
떠날 때에도 ‘계율을
스승처럼 여겨라, 내가
떠난 후에는 계율이 너의
스승이다’라고 하셨죠
이는 제자들에게만 해당되죠
다른 사람들은 계율을 지키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죠
그의 제자들은 계율뿐 아니라
법문의 힘도 갖고 있었죠
그들은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집에
전선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기설비를
관리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플러그를 더럽히면 안되고
깨끗하게 유지하라 합니다
플러그가 더러우면 당연히
전기가 들어올 수 없죠, 그래서
우린 아이들이 더럽히지 않게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아이들이 더럽히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죠
관리인이 그렇게 말한 건
전선이 전력소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플러그를 깨끗이
하라고 말한 겁니다 하지만
다른 전선들은 너무 오래도록
끊어져 있었고 전력소와도
단절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깨끗이 닦는다 해도
소용이 없지요
이해가 되나요?
그래서 우리는 계율, 명상,
지혜 모두가 필요합니다
이것들은 처음에 필요한
것들이죠 앞으로는 다른
것들이 필요할 수도 있죠
계율, 명상과 지혜보다
더 높은 차원이
존재하니까요
그곳에서는 계율도
명상도 지혜도 없습니다
이 모든 걸 버릴 때가
최상입니다
하지만 이걸 듣고나서
모르는 척 하거나 나가서
계율을 어기며 ‘난 계율,
명상, 지혜의 등급을 뛰어
넘었어’라고 하지 마세요
특별한 척 하지만
밤에 귀가해서는 후회하고
죄책감을 어쩌지 못해
미쳐버리고 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이유로 미치게 됩니다
그들은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고집하거나
체면 때문에 계속합니다
대신 나중에 더 고통 받죠
알겠어요?
그러면 그들은 못 견디고
미치거나 정신병이 걸리고
악령에 들리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들의 양심이
나와서 그들을 꾸짖죠
그러면 에고도 나와서
양심을 꾸짖습니다
이 둘이 서로 꾸짖으면
사람들은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립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건
우리의 본질을 봐야 합니다
우리 능력을 알아야 하죠
그저 남의 이목을 끌려고
일을 망치고
우리 수행과 정신을 해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뭐가 좋죠?
온 세상이 우리를 알아봐도
지옥에 가면 귀신, 마야도
당신을 알아볼 텐데
그게 뭐가 좋죠?
예를 들어
손오공은 큰 실수를 해서
천국을 혼란스럽게 한 죄로
오백 년 동안 갇혀 있었고
매우 고통스러워했죠
온 세상이 그를 알지만
좋은 게 뭐죠?
그에게 뭐가 좋죠?
고통만 받았을 뿐이죠
뭐가 그를 압박했죠?
그의 죄책감입니다
누가 그를 괴롭히죠?
왜 부처가 그런 일을 하죠?
그를 압박한 건 그의
양심입니다 이해해요?
우리가 나쁜 일을 하면
양심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기고
우린 미치게 되죠
알겠어요? (네)
그러니 계율을 지키고
어떤 걸 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확히 판단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계율은 우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옥이 두려워
계율을 지키는 게 아니라
큰 압박을 견디지 못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우리는 사회의 압박도
견디지 못합니다
많은 이들은 의지가 강합니다
우린 그걸 견디지 못하죠
난 계율을 지키는 것에 대해
여러 번 설명했습니다
예로 고대 중국에서는
남자가 부인을 여럿 뒀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부인이 여럿이면 사람들이
당신과 나머지 부인들을
깔볼 거에요
그렇죠? (네)
그럼 여러분은 못 견딥니다
만약 견딘다 치더라도
삶이 어떻게 될지 알게 되죠
시대가 바뀌었고
사람들도 바뀌었습니다
생각들이 모두 다르니
우리 혼자 그들을 극복할 수
없거나 아님 문제가 생길
겁니다 이해해요?
사회적 압력은 우리에게
많은 골치거리를 줄 수 있죠
많은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남편이 한 명입니다
만약 여러 남편을 가졌다면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볼까요 아무도 그녀를
존경하거나 좋게 여기지 않죠
다들 알 겁니다
하지만 티벳에선 그렇지 않죠
비교할 수 있도록 한번 더
얘기할게요 그럼 계율에 대해
알게 될 겁니다
사회적 압박은 골치거리
이면서도 대수롭지도 않죠
알겠어요?
티벳에서는
한 집에 3,4명의 형제가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같은
부인과 결혼하려 하지 않으면
그는 같이 살 수 없습니다
사회가 그를 쫓아내죠
가족들이 그를 거부하고
쫓아내며 어떤 재산도
주지 않습니다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가족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떠나야 합니다
그는 가족을 떠나 홀로
힘들게 벌어 먹어야 합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지요
그 정도입니다
그는 그녀를 3,4,5,6 명의
형제들과 공유해야 하죠 물론
이런 상황을 못 견딜 수도 있죠
만약 그녀를 거부하면
가족들이 그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그게 뭐가 대수죠?
그런 곳에서도
생불들이 태어납니다
내 말은 왜 티벳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살면서 아무런
싸움도 죄책감도 없는 거죠?
그것에 익숙하기 때문이죠
날 때부터 2-3명의
아버지가 있었으니까요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그들에겐 아버지1, 아버지3,
아버지4, 아버지5,
아버지6이 있다는 걸
알았죠 이해해요? 하지만
어머니는 한 명 뿐이었죠
그들은 이런 것에 익숙하죠
그래서 성장하면
같은 일을 받아들이죠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관념이나 습관이 없어서
못 견디는 거죠 알겠어요?
우리는 싸우고, 소란 피우고
남을 때리기도 할 것입니다
때론 죽이기까지 하지요
한 여자를 두고 형제끼리
죽일 수도 있죠 그렇죠?
관습의 차이 때문에
그런 거죠. 그게 다에요.
관습이나 습관 때문에
살인한다면 뭐가 좋죠?
내 말뜻 이해해요?
이곳은 일부일처제여서
두 명의 형제가 같은
여자와 결혼할 수
없죠 그리고는
더 문명화 됐다 말하죠
우린 그렇게 생각하죠
하지만 형제가 한 여자를
사랑해서 서로 싸우고
사랑 때문에 죽일 수도 있죠
그런 일이 일어나죠? (예)
그런 일들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죠 그렇죠?
때로 이런 일은 사촌 간에
일어나기도 하고
형제 자매 간에
일어나기도 하죠, 맞죠?
관습 때문에 한 사람이
다른 이를 죽이죠
다른 이가 근친상간을
범했다며
그를 죽이지요
타당한 이유가 있다며 죽이고
사람들은 그를 지지하며
그가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죠
그게 뭐가 좋죠?
관습 때문에 한 두 사람
죽이는 게 좋은 건가요?
당시엔 계율이나 관습을
보호하기 위해 죽였죠
좋다고 생각해요?
(아니오)
나도 아니에요
계율이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 이 말을 했죠
여러분을 이해시키기 위해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거에요
이제 알겠어요? (예)
하지만 여러분이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스스로 견딜 수 없을 거에요
당신과 다른 이에게
문제를 만들 겁니다
그러니 계율을 지켜야 해요
이 얘기를 통해 여러분은
관습, 습관, 계율이 사람이
만든 거란 걸 알았을 겁니다
사회적 압력이나 관념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죠
절대적인 게 아니니
그것에 의지해선 안 되죠
난 그것들을 그리 강조하지
않아요 알겠어요?
영적 수행을 잘하려면
이러 저러한 것을 해야
한다고 가르칠 뿐이죠
알겠어요?
하지만 살인처럼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물론 좋지 않지요
이 세상에서는 어떤 것도
영원한 행복을 주지 못해요
소위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영원하진 않죠
결혼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 생각하고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영원하지 않죠
얼마 안되 연인들은 꼬리를
들어내며 서로에게 소리치죠
왕의 생활도 지루하죠
고대에는 황제가
많은 왕비를 거느렸죠
한 왕비에게 싫증나면
사랑과 행복, 환상을 쫓느라
또 다른 왕비를 불러들였죠
황제의 신분이라
그렇게 계속할 수 있었죠
황제만이 여러 아내를
거느릴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불가능 했죠
그의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그가 행복해져서
백성을 더 잘 살피도록 하기
위해서죠 왕비들에게
빠지지 않는다면 말이죠.
하지만 온갖 계략으로 그를
유혹하려는 나쁜 왕비에게
빠지기라도 하면
문제가 생기게 되죠
바오시같은 나쁜 첩은
황제를 나쁜 군주로 만들고
온 나라에 피해를 줬어요
위험했지요
여러분이 부처인지
마야인지 아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어떻게 아는지 아나요?
불성을 얻었는지를
어떻게 아는지 아나요?
간단한데, 아직 모르네요
부처처럼 생각하고
부처처럼 행하며
부처처럼 말하면
그날 여러분은 부처이며
매일 이렇게 행동하면
여러분은 매일 부처죠
말과 생각과 행동이
나쁘면
여러분은 마야와 같지요
알겠어요? 매우 간단해요
왜 부처와 하나되지 못하죠?
여러분이 세상만 너무
생각하기 때문이죠 알아요?
그것에 익숙해져 있지요
소위 도덕적 원칙에
묶여있는 거죠
알겠어요?
부모에겐 이렇게 대하고
아내에겐 이렇게 대하며
친구에겐 이렇게 대해야
한다는 의무감 말이죠
이해해요?
물론 그들을 인정해야 하죠
그건 나쁜 일이 아니에요
우리가 좀 더 넓은 각도에서
본다면 우리에겐 세세생생
수많은 아내와 부모, 연인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죠
알겠어요?
현재의 부모가 과거의
연인이었을 수도 있죠
어떤 어머니들은 아들을
극단적으로 사랑하기도 하죠
혹은 아들이 부모를
지극히 사랑하기도 하구요
그들의 사랑은 부부나
연인들의 사랑보다 깊지요
때로는 그들의 사랑은 보통
부모 자식간의 사랑 이상이죠
그건 머지 않은 전생에
연인이어서 그래요
그래서 이걸 이해 못하고
비정상적인 관계나 관념을
가졌다고 여기지요
알겠어요?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해하게 될 거에요
옷만 바꿔 입었을 뿐
감정이 바뀌진 않았죠
그들은 변하지 않았고
관념도 바뀌지 않은 거죠
그래서 윤회해서
다시 돌아 온 이후에도
전과 똑 같은 거지요
죽은 뒤에
달라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관념을 바꾸고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그래야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해탈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통찰할 수 있죠
죽을 때 그가 누구를
생각하며, 죽을 때 그가
우리를 놓아줄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해요
이에 우리도 약간 기여하죠
우린 영적 수행자인데도,
그들이 이런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대신
우릴 구속하도록 돕죠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이행하지만 감정은
그들에게 묶인 게 사실이죠
이해하겠어요?
그래서 그들을 도울 수 없죠
대신에 우리를 구속하도록
돕죠 그럼 양쪽 다 구속되어
다시 윤회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죠
부모, 아들, 딸로 다시
태어난다면 괜찮죠
하지만 그렇지 않죠
안타깝게도 한 명은 개로
다른 한 명은 인간으로
태어나죠 알겠어요?
아니면 한 명은 주인이 되고
다른 이는 노예가 되죠
이렇게 되죠
한 명은 소가 되고 다른
사람은 농부가 되죠
그리고 소는 농부에게
노동으로 사랑을 갚아요
이해하겠어요?
그들은 서로에게 집착해
농부는 소처럼 보이고
어떤 사람은 개처럼
생기게 되죠 이해해요?
이는 전생의 그들의 관계
때문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죠
알겠어요? 그건 단지 습관일 뿐이죠
육체에 집착하는 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죠 습관이죠
여러분은
함께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붙어 있고
서로 돌보고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이런 일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것들을 잘
살펴보면 알게 됩니다
잘 살펴보면 감정과 습관이
어디서 생겨나는 지 알게 되죠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서로 붙어있을 육체를
가지지 않았죠 그렇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엔
의지할 부모가 없었고
돌볼 아이들이 없었고
사랑할 연인이 없었죠
죽은 후 우린 어디로 가죠?
우리 몸은 변할 겁니다
간혹 우리의 친척이,
전생의 연인, 친척 적들
일 수도 있죠 그렇게 모두가
싸우려고 다시 돌아오죠
싸우지 않을 수도 있어요
누가 전에 다른 이의 팔을
부러뜨렸다면 이번 생에
그는 팔을 부러뜨린 사람과
결혼을 합니다
전에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평생을 그 사람을
돌봅니다 그게 전부죠
인과 때문이죠 그들은
서로에게 점점 더 집착해
새로운 감정을 갖게 되죠
새로운 감정이나 업장을
갖게 되죠 즉 새로운 관계나
새로운 인과관계죠
그들은 서로에게 갚기 위해
다시 윤회해야 합니다
한 번에 갚기엔
충분하기 않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서로 갚고 나서도
또 다시 서로에게
갚아야만 하죠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요
그래서 다시 갚기 위해
되돌아 와야 합니다
물론 얼마나 갚았는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갚기 위해
계속해서 돌아와야 하죠
예를 들어 여러분이
나를 보러 여기 왔어요
나중에 서로 사랑이 깊어져
문에서 내가 여러분과
헤어질 때 날 혼자 보내고
싶지 않을 거에요 그래서
나와 함께 동행합니다
나중엔 내가 다시 동행해야죠
만약 서로가 이렇게
계속 한다면
언제 그걸 끝낼 수 있죠?
모두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기지만
신이 일체를 돌보시죠
풀과 나무조차도
그분이 지으셨죠
어찌 돌보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일은 자연히
처리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보라, 들에 핀 작은 백합도
신이 돌보신다
신의 영광이 그 속에 있으니
너희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신의 권능과 영광이
우리 안에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 이해합니까?
신은 우리가 하는 것보다
사람을 더 잘 돌보시죠
우린 서로 너무 집착하기에
일을 잘 해내지 못합니다
더 많은 업장을 만들고
감정이 더 깊어져서
갚을 게 더 많아집니다
정말 끔찍해요
모두들 이 얘기를 알 겁니다
수행을 잘 하는
한 부부가 있었어요
어느 날 남편이 죽었죠, 맞죠?
그랬어요
그는 죽어야 했지만
그의 아내는 너무 슬퍼서
그의 얼굴을 잡고 울었어요
그의 영혼이 몸을 떠날 때
그녀의 콧속으로 들어가서
콧속에서 벌레가
됐어요, 맞죠?
아내의 코는 돌연 부어올랐고
어떤 약으로도 고칠수 없었죠
하루는 그녀의 스승이 왔어요
한 스님이 왔죠
남편의 스승인지
그녀의 스승인지 모르겠어요
아마 그녀는 불교가
됐었을 거에요
스승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에게 물었어요
그녀는 남편이 죽었고
코가 부었으며 낫지 않는다고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고
벌레가 나왔어요
그러자 스승은 얘기했죠
“남편은 이제 생사에서
해방되었어요”
그제서야 남편은 정말로
죽었고 아내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죠 알겠어요?
나는 수도 없이 여러분에게
인간의 감정은 사람을 묶고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며,
사람들을 구할 수 없다고
말해왔어요
사람들이 서로 붙어있어야
서로를 잘 돌볼 수 있다면
석가모니 부처는 부모를
떠나지 않았겠죠
아니면 적어도 깨달은 후에는
궁으로 돌아가서
돌아가실 때까지
부모님을 모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죠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만
궁으로 가서
자식으로서의 모습을 보였죠
물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는 관습에 따라
행해야 했어요
아마도 궁 근처에 있었기에
궁으로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거예요
멀리 있었다면
가지 않았겠죠
그건 다른 이야기예요
그가 집에 머물며
부모를 모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면
그 자신은 실수를 했더라도
독자인 라훌라는
그러지 못하게 했을 거예요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는데
그에게 왔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까?
부처는 깨달았어요
자신의 길이 좋지 않았다면
아들이 따르게 했을까요?
이 길에서 고통을 받았다면
아들이 이 길을 따라
고통 받게 했을까요?
여러분 자신이 불교도라면
부처가 했던 것과 똑 같이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와 똑같이 해야 합니다
하루는 어머니와 누이가
만나러 와서
밖에 앉아 예수를 기다렸죠
사람들은 예수에게 고했어요
“어머니와 누이가
찾아왔어요”
그는 모른척하며 말했죠
“누가 내 어머니고 누이죠?”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요?
“내 친척과 친구는 나와 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는 진정 그렇게 말했죠
그러니 기독교인이든
불교도이든
그와 같이 행해야지
회피해선 안 되요, 좋아요
모두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묶인 겁니다
사실
우린 전혀 책임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육체가 있으므로
신께서 우릴 쓰고자 하시면
그냥 쓰는 겁니다, 알겠죠?
예로, 신은 이 나무를 사용해
우리가 그늘을 즐기게 합니다
땅을 만들어 걷게 하고 그는 나무 등등을 만들었죠
우리의 육체를 활용해 뭔가
흥미로운걸 하게 하는 거죠
깨닫고 나면
자신의 운명을 알 겁니다
공자도 예순이 되기 전엔
자신의 숙명을 몰랐어요
노자는 아주 늙어서야
미련 없이 떠났습니다
그 전엔 자신이 이 세상에
책임이 있다고 느꼈죠
후에야 전혀 책임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나려 할 때
그의 제자가 그를 가두고
책을 쓰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고 했죠
그래서 그가 도덕경을
쓰게 됐던 겁니다
사람들은 단지 책임감 때문에
생사윤회를 합니다
사실 우린 책임이 없어요
모든 건 신이 행한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얼 할 때
결코 이렇게 생각할 수 없죠
왜냐하면 에고로 행하면서
가끔은
신의 의지를 모르니까요
그래서 무얼 하든 간에
성공하지 못하고 아무도
우리 말을 듣지 않아요
그럼 비참해지죠
책임감은 아무것도 아니죠
내가 여기에 살고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쓰는게
내 책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전혀 그럴 필요 없어요
몇몇 제자에게 근처에
거주하며 뜰을
쓸게 할 수도 있어요
난 아마도 내 책임이라
여기고 뜰을 깨끗이
청소하려 할지도 몰라요
어떤 이는 그걸
의무로 여기며 자신을
비범하게 여길지 모르죠
저기에 개가 있어요
어떨 땐 아무도 오지 않아도
짖고 으르렁 거리죠
그게 자신의 책임인 거예요
이해하겠어요?
누가 온다면 개가
짖는 건 말이 되지만
아무도 없는데도 짖어요
지루하다고 느끼면 짖어대죠
안 그러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
사람들이 개로 알아주지 않죠
그래서 짖어야 하죠
고요하고 평화롭게
앉아 있는데
모기는 우리를 물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고 생각하겠죠
그들은 모기로서의 책임을
다한 거예요
호랑이도 토끼를 보면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잡아 먹으려고 하잖아요?
모두 자신에게
책임이 많다고 생각하죠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책임이 있다는 거죠?
이런식으로 늘 자신을 속이며
우리는 세세생생 한 구석에
묶여 있어요
우린 심지어 억지 논리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단점과 무지를 덮고는
그걸 깨려고 하지 않습니다
안 된 일이죠!
자신이 없으면 세상이 끝난다
생각합니다
등급이 아주 낮은 거죠
“천하본무사”라는 말도
필요 없어요
도덕경을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노자의 책을 읽으면
머리만 아플 거예요
도덕경을 비난할 겁니다
우리의 터무니없는 기운이
도덕경을 오염시키니까요
공자나 장자의 책을 읽을 때
우린 웃으며 이해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자신을 점검하며 스스로를
동정해야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무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이해하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무지한 거예요
우리가 알면 무지하지 않겠죠
내 말 뜻 이해하겠어요?
자신의 무지를
인정 안하니 절망적인 겁니다
자신이 무지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내면의 불성이 나와
우릴 구하지 않는 거예요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무시하니 그가 잠든 겁니다
불성은 자유로워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아요
불성은 묻지 않으면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도 매우 즐거웠어요, 왜죠?
작가는 인도사람인데
1950년에 죽었어요
그는 인도에서 살아있는
부처로 여겨지며 유명했죠
그는 나가서 강연하지 않고
자신의 거처에 머물렀는데
사람들이 찾아와 존대했죠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왜 기분이 좋았을까요?
그건 이 스승을 보러 왔던
사람들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들 중에는
매일 그 스승 곁에 있는
한 제자가 있었어요
그는 청중이 아니라
스승을 위해 통역하려고
매일 거기에 갔어요
그는 영어와 많은 지방어를
알았어요
그는 자주 거기에 가서
사람들을 위해 통역했어요
사람들은 그에게
그들의 질문에 스승이
답한 것을 적어달라고 했죠
그는 그걸 적어줬어요
왜 내가 기뻤을까요?
거기엔 “제 병이 어떻게
나을 수 있을까요?” 따위를
묻는 이가 없었거든요
그들은 전부 수행에
관련된 질문만 했어요
스승은 그런 질문을 들으면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많은 얘기가 있지만
이런걸 묻기도 해요
어떤 사람들이 그 스승에게
어떻게 제자를 축복하는지,
그에게 진실로 축복의 힘이
있는지를 물었어요
스승의 축복이 필요한지
스승이 정말 축복의 힘을
가졌는지 물은 거죠
그 스승은 종종 말했죠
“스스로 수행해야 합니다
난 줄 게 없어요” 라고요
모든 스승이 그렇게 말하지만
때때로 이 스승은 잊고서
스승이 지닌
축복의 힘도 효력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는 진실을 말하는 데
익숙해서 무심코 흘린 거예요
가끔 뭔가를 흘리곤 했죠
그 스승이 말했죠
“세 가지 축복이 있어요”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으니
올 필요 없다 그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니 스스로
수행하라고 말하고 했죠
하지만 그들은 계속 질문했죠
“모든 경전에 말하기를
스승과 스승의 축복이
우리에게 효력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니면 올라갈 수 없다고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그 스승이 마지못해 말했죠
”세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축복한다고 말하지 않았죠
그의 제자들은 간혹
스승이 축복한 걸 알았죠
그 스승은 누군가를 축복할때
그걸 내보이지 않았죠
외부인들은 알 수 없었지만
제자들만 알았나 봐요
그 스승이 말했어요
“세 가지 축복 중
첫째는 눈으로 보는 것이죠”
그는 분명히 말했어요
“둘째는 손이 닿는 것이고
셋째는 생각하는 겁니다”
내면으로 생각함으로써
축복이 전해집니다
그는 또한 생각이 소통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말했죠
모두 그걸 할 수 있진 않죠
이 책에는 좋은 이야기가
많아요
시간이 나면 읽어줄게요
내가 이 유명한 스승이
매일 어떻게 지냈는지,
그가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고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며
어떻게 그들과 어울리며
살았는지 알려 줄게요
그는 종일 아무것도 안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나서
산책을 하며
운동을 좀 했어요
그리고는 잠자리에 들었죠
제자들이 보러 오면
함께 모여 앉았지요
그들은 그가 앉아 있으면
종도 안쳤는데
함께 모였어요
그들에게 종을 치는
전통은 없었어요
그저 자연스러웠죠
하지만 그에겐 매주
모이는 우리처럼 많은 제자가
있는 건 아니었죠
그들 단체는 작았지만
매일 모였어요
여기 우리처럼 많지 않았어요
거기엔 출가한 이들이
수십 명 있어서
스승이 앉아있는 걸 보면
함께 스승 옆에 앉곤 했죠
그가 밖에 나가 강연하거나
다른 걸 안 했기 때문에
산책을 한 후 돌아와
거기에 앉아있던 거죠
아마도 신문이나
경전들을 읽었겠죠
사람들이 그에게 경전에
대해 질문하면 답해주고
영적 수행에 대해 질문하면
상황에 따라 답해주었어요
그리곤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잡니다
오후에는 다시 산책을 하지요
제자들이 동행하기도하고
혼자 가기도 하죠
돌아온 후 저녁을 먹고는
잠자기 위해 눕습니다
때로 제자들이
모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그는 그렇게 살았어요
매일 그렇게 살았습니다
누군가 제자들에게 물었죠
“저 사람이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하나요?
왜 위대하다고 생각하죠?
그는 매일 먹고 잠자고
산책만하고 아무 것도
안 합니다” 이해하나요?
그는 매우 귀여웠죠
그는 상체에 아무 것도
입지 않았어요
전에 그 사진을 봤지요
지금은 없어요
그에대한 다른 책도 읽었어요
지금은 없지만
전에 읽었습니다
난 세계를 여행할 때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그냥 거기 남겨뒀어요
책을 모으지 않았지요
아니면 책이 많았을 거예요
그는 속옷으로 입는
천 한 장 말고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았죠
인도인들은 천 한 장으로
몸을 감싸는걸 좋아하죠
부끄러우면
이렇게 천 한 장으로
상체를 감쌉니다
알겠어요
상체의 반만
감쌉니다, 알겠어요?
가운데를요
그 때 옷을 가장 많이 입었죠
여자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때
그렇게 입었어요
아니면 속옷만 입었죠
그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그는 어릴 때부터 수행을
시작했어요
책에 흥미로운 얘기가 있어요
22살 이었을 때
그는 약간의 고행을 했어요
어떻게 하게 됐을까요?
고의로 하진 않았어요
그는 세속의 사랑을 버리고
가족을 떠났죠, 알겠어요?
그는 결혼하지 않고
명상하러 동굴에 들어갔죠
그 당시 그는 말랐어요
많이 먹거나 자지 않았죠
그는 매우 말랐어요
그를 보면 아이조차 울며
그를 동정했죠
어느 날 8-10살쯤의
아이가 큰 소리로 울며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그의 이름은 “바가반”으로
신을 의미합니다
그는 진짜 바가반 이었죠
사람들이 바가반으로 부르니
그 아이도 바가반이라 불렀죠
본명은 “라마나
마하리쉬 바가반” 입니다
그 아이는 그에게 물었죠
“라마나 바가반!
왜 사서 고생을 하죠?
왜 집에서 살지 않죠?
너무 말랐어요
젊고 잘생겼는데
너무 고통 받는군요”
바가반이 말했어요
“나는 집에 머물 수 없다
난 가족과 문제가 있어서
여기 오게 되었단다”
아이가 말했죠
“더 이상 고통 받지 마세요
제 사장님에게 소개해 줄게요
열심히 일하면
하루에 2달러를 줄 거에요
그러면 먹고 마실 수 있죠
좋다면 말씀 드릴게요”
바가반은 “좋다”고 했죠
아이를 기쁘게 하려고요
매우 귀엽지요
그가 귀엽지 않나요?
물론 그는 일하러 가지 않고
수행을 하고 있었죠
어느 날 그는 여전히
거기서 고통 받으며
뼈만 앙상했죠
그 아이는 물었어요
“어디서 음식을 구하세요”
바가반은 말했어요
“누가 음식을 주면
먹고 주지 않으면 안 먹지”
그래서 그 아이는
그가 음식을 먹도록
사장에게 소개하려 한 거죠
어느 날 노부인이 왔어요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그를 꾸짖었어요
“참 어처구니 없고
어리석고 지독하구나
왜 여기서 그렇게 지내는지
난 참을 수가 없구나”
그녀는 그의 고통을 못견뎠죠
“왜 집에 살며 남의 기분을
편하게 해주지 않니?”
그녀는 계속 꾸짖었지만
그는 참았지요
때로 사람들은
남의 일에 간섭을 해요
그래서 때로 수행에
장애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채식을 하면
사람들은 이유를 묻고
문제를 일으킬 겁니다
명상을 하면 우리에게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하지요
내면으로 진실로 행복하면
우린 아무 문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