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의 힘을 인식하는 법- 4부 1988년 8월 4일, 포모사 타이베이(중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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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신통력이 있어서 미리 재앙이 올지 안다고 합니다 그는 불찬을 듣고 눈물을 흘렸으며 그의 지혜안이 진동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관음법문과 상관이 있을까요?

그에게 어떤 신통력이 있는데요?

자세하게 말하지 않고 언제 재앙이 오는지 미리 안다고만 했어요 그가 안다고요? 불찬을 들었을 때 울었답니다 그건 신통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불찬을 듣고 똑같이 반응했어요 불찬은 우리 내면의 갈망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우는 거에요 영화만 볼 때도 우린 웁니다 불찬은 듣는 건 말할 것도 없죠 그건 별일 아닙니다

그는 미래의 재난을 볼 수 있어요 전생에 영적으로 수행을 했으니까요 그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좀 있어요 그것도 별거 아니죠 그에게 장애가 될 뿐입니다 예컨대 누가 삼일 뒤에 내 돈을 훔치러 와서 내 목을 벨 거란걸 안다면 삼일동안 잠을 설치지 않겠어요? 내가 그런 일을 미리 모른다면 적어도 삼일 동안은 잠을 잘 자겠지요 그런 다음 그냥 삼일 뒤에 죽겠지요 그게 안 좋은 업장이 오는 때이며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지요 우리가 그 일을 알든 모르든요 설사 오늘 안 좋은 업장을 피했다해도 내일 다시 올 겁니다

점술가를 찾아간 사람의 얘기가 있어요 점술가는 말했죠 『이번 달에 차사고를 당할 테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믿었어요 그는 돌아가서 아주 조심했지요 그는 차고에 차를 세워두고 잠가버렸습니다 그는 모든 목적지를 다 걸어갔습니다 그는 길 모퉁이나 대로로 안 다녔어요 그는 보도로만 다녔습니다 네,보도 말입니다 한 달이 다 가도록 아무 일도 안 생겼어요

마지막 날에 그는 말했어요 『거의 다 지나갔군! 내일이면 자유구나!』 그는 마지막 날 나기기 싫었습니다 그는 말했어요 『이제 하루 남았군 집에 있는 게 좋겠어』 마지막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집에 있었어요 그는 문을 잠그고 집에서 텔레비전을 봤습니다 헌데 갑자기 심한 복통이 느껴졌어요 통증이 너무 심해서 약을 좀 사러 가야 했습니다

그는 말했어요 『괜찮아! 약국은 오른쪽에 있으니까 걸어가면 되지』 그래서 약을 사러 갔습니다 그는 도보를 아주 조심스럽게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알기도 전에 어떤 아이의 장난감 자동차가 떨어졌어요 알다시피 장난감 자동차도 꽤 무겁죠 그게 머리 위에 떨어져 죽었죠 끝났어요 그것도 자동차사고 입니다!

스승님 출가승들이 부모님을 뵈러 집에가도 될까요?

네,왜 안되겠어요? 석가모니 부처는 성불 한 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에 가서 관을 묻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영적 수행자가 나무조각이나 돌덩이가 아니란 걸 알리고 싶었던 거죠 영적 수행자도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는 자기 부모에게 성심을 다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인간 감정이 있었죠 부처도 제자들이 그 부분에 대해 명확히 하길 바랬죠 그래서 돌아와 아버지의 관을 날랐던 거예요 관을 날랐던 건 상징적이었어요 그럴 필요는 없었죠 제자들이 많았으니 부처대신 그들이 했었을 겁니다 하지만 부처도 여전히 인간의 감정을 가진 것을 제자들이 알기를 원했어요

스승님, 불경에는 『부처가 되기 위해선 삼십육만 년이 걸리며 수많은 영겁의 세월이 걸린다』고 써 있습니다 입문하면 바로 부처가 된다고 써있는데 여태까지 수많은 윤회와 환생을 통해 지은 업장은 어떻게 되나요?

당신은 이미 오랫동안 윤회를 했어요 삼십육만 년보다 더 오래요 다시 돌아오고 싶으세요? 이미 오랫동안 수행해왔어요 이건 지난 생이에요 당신이 관음법문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수행을 해 왔다는 의미에요 이건 지구상에서 지난 생이에요 당신은 해탈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관음법문을 수행하길 거부하는 건 아직도 윤회할 필요가 있다는 걸 의미해요 아직 그들의 시간이 오지 않았지요

위대한 스승님, 스승님이 언급하셨던 관음법문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관음법문이 무엇입니까?

입문부터 시작합니다 관음법문은 우리의 진아를 즉시 알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지요 원래 우린 어떤 존재였죠? 우리가 가진 힘은 무엇이죠? 우린 어디서 왔죠? 우린 원래 뭐였지요? 우리 힘은 어디 있죠? 고통으로부터 우릴 구하고 고통으로부터 친척과 친구를 구할 힘은 어떻게 사용하죠?

이것이 관음법문이에요 입문하는 동안 약간의 확증을 얻는데 그건 부처의 빛을 봄으로써 우리가 깨달았다는 걸 증명해주지요 『부처의 빛』은 우리 자신의 진아이죠 두 가지 양상이 있어요 하나는 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빛이에요 이것들은 우리 자신의 진동과 힘에서 옵니다 우린 이걸 알게 될 겁니다 이게 관음법문의 개요입니다

스승님, 우린 악업 때문에 이 세상에 왔습니다 입문해도 여전히 악업이 남아 있다면 더 높은 세계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의 악업을 제거해야 합니다 입문 후에 내가 당신의 남아 있는 악업의 일부를 처리하는 데 도울게요 작은 악업조차도 남아 있으면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어요 그래서 당신은 입문할 필요가 있어요 스승이 당신을 돕기 위해 스승의 힘과 연결할 필요가 있지요 우린 하나이므로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내면의 교류인 입문을 통해 우리가 하나가 되면 당신의 문제는 네 것이 되죠 그렇게 하여 내가 중재하는 겁니다 그러면 난 당신을 묶고 있는 악업을 처리할 수 있지요 악업이 풀린 후 당신은 자유롭게 떠나지요 사실, 작은 악업조차도 당신의 해탈을 방해할 거예요 누군가에게 단지 십 센트라도 빚지면 떠날 수 없어요 많은 악업이 있다면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스승과 관음법문이 필요한 겁니다 아니라면,누구의 도움도 없이 쉽게 떠날 수 있었겠지요! 그것은 마치 당신이 진흙 속에 빠졌다면 당신을 꺼내 줄 단단한 땅에 있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과 같아요 당신이 진흙 속에 빠지지 않았다면 당신을 구해 줄 사람이 필요 없는 거지요 당신 스스로 걸을 수 있으니까요

스승님, 이해를 통해서 깨닫게 되나요? 아니면 해탈을 달성했을 때만 깨닫게 됩니까?

이해로만은 안됩니다 진정으로 깨달을 필요가 있어요! 진정으로 해탈해야 합니다 진실로 체험을 입증해야 합니다 신체와 세상이 없이 모든 물질적인 현상을 초월하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난 많은 옷을 입지요 목욕을 하고 싶으면 그걸 벗어야 합니다 『옷을 벗는 것』이 옷을 입지 않는 것과 같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 아니죠 그건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에요 난 확실히 이해하지만 실제로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게 소위 내적 체험인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옷을 벗는 건』은 『옷을 하나씩 벗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니에요 당신은 실제로 옷을 벗어야 합니다

생사에서 해탈한다는 것도 똑 같은 거예요 당신은 진정으로 해탈해야 하며 해탈을 알아야 합니다 해탈의 의미를 단순히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아요 영적 수행은 이해가 아니라 실제로 내적 체험을 통해서 그걸 증명하는 것입니다

스승님, 사람이 깨달았다는 징후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깨달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요?

그걸 증명하는 건 어려울 거예요 석가모니 부처를 보세요 그와 보통 인도인과 다른 점이 있나요? 있어요? 없지요 인도에 가면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외모가 석가모니 부처처럼 생겼어요 대부분의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겼잖아요 외모로는 구별할 수 없지만 그와 얘기하거나 질문을 하면 그는 주저 없이 쉽고 빠르게 답합니다 그는 어떤 질문이라도 답할 수 있죠 이것으로 그가 뭔가를 갖고 있다는 작은 실마리가 되죠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입문을 줄 때 경전에 묘사된 대로 우리가 어떤 깨달음의 체험과 증거를 가진다면 그가 깨달았다고 우린 말할 수 있어요 그 사람에게 배우지 않는다면 그걸 잘 모를 거예요 그 사람에게 배우면 배울수록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지요 그게 아니면 그는 외모가 다른 사람과 똑 같을 겁니다

스승님, 선불교의 돈오법문은 당신이 가르치는 즉각 깨달음과 같습니까? 이 둘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것들은 원래 같았어요 그것들은 같지만 이른바 오늘날의 선불교는 다릅니다 고대 선불교에선 같은 관음법문을 수행했지만 현재의 선불교에선 덧없는 인간의 언어를 써서 오직 지적인 문제만 공부합니다 『내가 누구지?』 『누가 불경을 외우고 있지?』 『달마는 왜 중국으로 갔지?』와 같은 그런 것들만요 원래 이 둘은 같았어요 오늘날의 선불교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죠

스승님,카톨릭교 기독교,회교 그리고 불교 모두 같은 걸 강조합니다 선해지고 악행을 피하는 거죠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주일 학교에 다니고 목사가 됨으로써 영적으로 수행합니다 왜 불교인의 영적 수행은 오직 머리를 깎고 스님이나 스승이 되려고 절에 사는 것만으로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종교의 원래의 본질을 점점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어요 그래서,오늘날 서양이나 동양이나 사실상 언제나 같아요 살아 있는 스승이 있을 때는 언제나 참된 법문과 진리가 있지요

스승이 세상을 떠나고 수백 년이 지나면 그 법통은 점점 쇠퇴합니다 그것이 다른 장소로 확산됩니다 그러면 남은 제자들은 조직되고 함께 모이기 시작하여 종파를 이룹니다 그들은 죽은 스승의 상에 엎드리고 과거 스승의 경전을 읽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또한 점점 본질은 더 적게 남게 됩니다 법통의 본질이 없는 종교적 의식만이 점점 더 많아 집니다 서양인지 동양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스승 없이는 진리도 없습니다 내적인 가르침이 없이는 외적 의식만 남게 되죠 참된 가르침은 법통과 법통 없는 경전을 모두 포함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모든 것이 그저 『스승님이 말씀하시길』 이며 정말 무익합니다 그건 우리가 깨달은 스승을 찾을 시간이 없도록 우리를 묶는 겁니다 우리가 진리를 찾지 못하게 하지요 그건 더 나쁩니다

스승님,왜 부와 권력과 같은 세상의 힘은 없어질 수 있는데 영적 수행을 통해 얻은 이 세상 너머의 힘은 없어질 수 없습니까? 영적 수행을 통해 이 힘을 얻는다면 궁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했습니까?

네,여러분 모두 이 세상의 힘을 압니다 이미 내가 그에 대해 말했지요 오늘 여러분은 공무원 이지만 내일은 죄수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부자이지만 내일은 거지일 수도 있어요 보통 사람도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너머의 힘은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잡거나 가두거나 훔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지요 이것이 수행을 통해 깨닫게 되는 내면의 힘입니다

우리는 이 힘을 원하는 누군가에게 보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원치 않는다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훔칠 수 없는 겁니다 이 힘은 완벽히 제어가 가능합니다 이 세계의 힘이 외부의 영향을 전제로 하는 것과는 달리 내면의 힘은 완벽히 우리의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가 가진 힘을 볼 수 없습니다 훔치는 건 고사하고요

그들은 돈과 사회적 지위를 볼 순 있어도 내면의 힘을 지각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허락할 때만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도록 허락할 때만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도 당신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거지 혹은 평범한 사람 등등으로 생각 할 것입니다

그가 또 묻기를 한번 불성을 알기만 하면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더 이상 이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가족과 직업적인 책임을 포기하는 것입니까?

왜죠? 누가 그랬나요? 안됩니다! 세속적인 책임을 버릴 수 없어요 가족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도 출가한 제자가 있어요 그들이 책임을 다했고 모든 가족 문제가 해결했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가족과 책임이 있습니다 계속 책임을 이행해야 합니다 그것들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더 많이 깨달을수록 자신의 책임을 더 잘 다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오해입니다 더 깨달을수록 책임을 더 잘 다룰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악업을 해결 하겠습니까? 악업도 해결 못하는데 어떻게 해탈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린 책임을 다하고 일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습니다 그건 모두 갚아야 할 악업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도망간다면 해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초연함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초연함은 마음속에서 집착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걱정이 없습니다 우린 우리를 가로막은 그런 덧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아이나 부인 등 모든걸 그냥 팽개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말한 건 그게 아닙니다

스승님 한 난민 가족이 남중국해 섬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가족 전체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남자 가장이 크게 소리쳤어요 『관음보살님! 예수님! 모하메드님』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요 아무도 구해주러 오지 않았어요 스승님,경전에서는 관음보살이 무소부재 하다고 하는데 왜 이 가족을 구하지 않았나요?

물론이죠,누가 이유를 말할수 있죠? 그 이유는 그들이 관음보살과 소통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영적 수행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석가모니 부처는 그렇게 열심히 수행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예수도 사막에서 명상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그는 강연만 하면 됐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관음 보살 석가모니를 단순히 찬양하는 걸로 충분했을 겁니다

왜 우리는 열심히 수행할 필요가 있나요? 왜 석가모니 부처가 그의 가르침을 펴고 경전을 그렇게 많이 설교하며 그렇게 많은 법을 가르쳤을까요? 팔만사천법문은 말할 것도 없고요 관음보살을 외는 걸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아니오) 그렇습니다 우린 실제 관음보살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관음보살과 소통해야만 합니다 우리 내면의 관음 보살의 힘을 꺼내서 사용 해야만 합니다 이름은 외는 것만이 아닙니다 비스켓을 왼다고 배가 부르나요? 이것이 명확히 설명합니다

나는 진리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부처의 진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잘못된 방법으로 수행합니다 석가모니가 진리를 말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우리가 관음보살을 알게될 때, 생사해탈과 재앙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에 세상에서 만들어진 덧없는 이름을 외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그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잘못 번역했습니다 번역자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세속적인 조건들을 붙였습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생각을 덧붙인 것입니다 불명확한 번역은 사람들의 영적 수행에 부정적 효과를 주고 보살의 이름을 외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걸로 충분하다면 왜 석가모니가 그의 제자인 아난다에게 『내면의 그의 자아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라고 했을까요?

그는 아난다에게 관음보살의 이름을 외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가 말했지요 『내면의 자아의 소리를 들어라』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우린 생사에서 해탈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관음』 이라고 부릅니다 이 관음이 진짜로 의미하는 건 내면의 소리를 관하는 겁니다 관음보살을 외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잘못 수행하고 있어요 그래서 결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를 탓하지요 부처는 어떤 것도 잘못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스승님,예수는 산에서 사람들에게 빵 다섯 조각과 두마리의 생선을 먹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채식을 하지 않아도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왜 채식을 옹호 하시나요?

이것은 오역에 의한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는 생선을 나누었습니다 어떻게 생선 2개로 5천명을 먹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생선 2마리가 5천명 에게 충분하죠?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중생들의 의지에 맞춘 것 뿐입니다

우린 중생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자비는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중생이 무엇을 원하든 우린 그것을 줍니다 그래서 대부분 인간이 부처가 되지 못하고 영적 수행에 실패하는 겁니다 그들이 세속적인 것을 원해서 그렇습니다 부처의 길을 걷길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세속적인 것을 주는 겁니다

그가 묻길,비록 스승님께서 『죽이지 말라』라고 했지만 현대 의약품은 인간 삶의 안녕을 위해 동물실험을 합니다 그런 실험을 위해 동물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의학이 발전하겠습니까?

살생을 했어도 진보가 없어요 그것은 무지입니다 과거에는 동물실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살았지요 요즘은 많은 동물들이 실험으로 죽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질병은 많습니다 누군가 언급했듯이 전보다 더 많습니다 과거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질병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동물 실험이 유용한가요? 아니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실험을 원합니다

동물들은 무력하기 때문이 인간은 쉽게 그들을 잡아서 실험용으로 죽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동물을 쓰지요 불쌍한 동물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 보다는 더많은 악업을 짓습니다 그리고 더많은 질병을 유발하지요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치료하기 힘든 그런 질병들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에이즈,암 그리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많은 다른 병들이 있죠? 동물을 시험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병원을 더 만들 뿐이지요 이전에는 병원이 아주 적었습니다 지금은 더 많지요 그것은 그렇게 많이 진보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진보는 우리 도덕성의 향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약 모든 인간이 도덕적이면 질병도 없을 겁니다 모두가 채식을 하면 암도 거의 없을 겁니다

만약 바꾸길 원한다면 내면으로부터 바뀌고 도덕적인 측면부터 바꿔야 해요 동물을 죽임으로써 바뀌지 않아요 약이 많다고 병을 더 치료하는 건 아니지만 더도덕적이면 가능해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습니다 죽이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스승님 채식을 하는데 반드시 계란을 먹으면 안됩니까? 안됩니다 계란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마녀들이 나쁜 영을 불러내는데 계란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계란을 먹으면 부정적인 영혼을 끌어올 것입니다 그래서 좋지 않습니다 계란은 수정란도 있고 무정란도 있어요 무정란일지라도 난자는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먹는다면 또한 살생의 형태입니다 계란이라도 부화만 되지 않았지 안에 난자가 있지요

스승님, 식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데 식물을 먹는 건 자비롭지 않은 건가요?

정말로 식물을 먹는 것도 자비로운 건 아닙니다 하지만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고기와 계란은 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식물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식물은 감각이 둔해요 상당 부분이 물로 이루어져 있고 의식도 거의 없지요 식물을 죽인다면 업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식물은 고통을 많이 느끼지 못하니까요 예를 들어,비행기가 날기 위해서는 많은 석유와 노동력 돈이 필요합니다 큰 트럭은 많은 기름을 사용하지요 하지만 오토바이는 훨씬 적게 사용합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측면에 속합니다

영적인 측면으로는 식물은 거의 감각과 의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여도 느낌이 작은 것입니다 나무의 가지를 자른다 해도 다른 가지가 자라날 것입니다 때로는 두 개 세 개가 더 날 것입니다 나무는 실제로 더 이득이고 잃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돼지를 죽이면 영원히 죽게 됩니다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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